1만명이 넘는 공신과 그 가족들은 사회악이었다
이들은 후에 훈구파가 되어 ‘당쟁’의 시초가 된다
북한의 역사서를 보면 모든 게 김일성과 연결된다. 3·1절 만세운동도, 항일독립운동도 모두 김일성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혹은 아들인 김정일과 관련된 역사이다. 남측이 영웅적으로 추앙하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도 김일성의 지도를 받지 못한 채 독자적으로 활동해 한계가 있다는 식으로 기술한다.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도 부인하고,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도 홀대한다. 심지어 단군마저 김일성 일가 우상화에 동원한다. 요즈음엔 3대 세습 후계자로 알려진 김정은 역사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온다. 이렇게 한 사람, 혹은 한 가문을 중심에 세워놓고 역사를 기술하다 보면 나머지는 모두 종속변수에 불과하게 마련이다. 어디 북한뿐이겠는가.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이덕일 지음/옥당/1만6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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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지음/옥당/1만6500원 |
김종서는 임금과 학문을 강론하는 지경연사(국왕에게 고전 강독과 논평의 임무를 가진 경연의 정2품 관직)로 젊은 선비들에게 태산북두로 추앙받은 문신이자, 국경이 위태로울 때마다 평안도 도체찰사(전쟁이 났을 때 군무를 맡아보던 최고의 군직)를 맡아 전장까지 달려가 여진족을 벌벌 떨게 했던 문무겸전의 대신이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좌의정으로서 유명(遺命)을 받아 12세의 단종을 보좌했다. 하지만 호시탐탐 왕위를 탐하던 수양대군(후의 세조)의 가노 임어을운에게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철퇴를 맞고 대역모반죄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됨으로써 계유정란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된다.
“계유년(단종1)에 임금은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고 대군(세종의 아들들)은 강성하니 인심이 위태로워하고 의심하였다. 황보인·김종서·정분이 삼정승이 되었는데, 종서는 지략이 많아 당시 사람들이 대호(大虎)라고 지목하니 세조가 그를 먼저 제거하려 하였다.”(명종 때 문신 이정형의 ‘동각잡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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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가 쓴 ‘몽류도원도’ 시문. 김종서는 이 시문에서 임금의 장수를 바라고 있지만 어린 단종이 성인이 되는 것도 지켜보지 못한 채 비명에 가버리고 말았다. |
김종서는 명분 없는 쿠데타를 모의하던 수양에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수양이 무사들을 모아놓고 김종서가 ‘어린 군주의 왕권을 제약하고 있으니 제거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해도 별로 귀 기울이지 않을 정도였다. 일부 무리는 대오를 이탈해 도망치기까지 했다. 그만큼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김종서는 당대 제일 가는 역사가였다. 정인지가 편찬한 것처럼 되어 있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진짜 편찬자도 실은 김종서였다. 그러나 세조의 입김으로 두 역사서에서 김종서의 이름이 삭제되었기에 그동안 김종서가 편찬자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문종실록에 돋보기를 들이댄 저자는 “김종서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를 바치니 세가 46권, 지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으로 되어 있었다”라는 구절을 발견했다.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 격살당한 후 ‘김종서’를 ‘정인지’로 바꿔치기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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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시 장기면에 있는 김종서의 묘. 김종서의 아들 김승벽이 도주하여 아버지의 시신을 모셨기에 오늘날 그의 무덤이 고향 근처에 존재할 수 있었다. |
영조 22년, 김종서는 사망한 지 293년 만에 공식적으로 신원이 회복됐다. 왜 그토록 오래 걸렸을까. 저자의 필력이 모여 있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를 두 가지 이유로 해석했다. 하나는 수양대군이 집권 후 제수한 2300여명이나 되는 공신들 때문이고, 두 번째는 세조의 후손들이 계속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세조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태종이 피의 숙청으로 제거한 공신들을 부활시켰다. 수양은 정공신의 자제, 사위, 수종자들인 원종공신에게 줄 벼슬이 부족하자 우선 나이가 많은 사람에겐 일없이 녹봉만 타가는 검직(檢職)을 제수하기까지 했다. 1만명이 넘는 공신과 그 가족들은 수양이 왕위를 꿈꾸지 않았으면 탄생하지 않았을 사회악이었다. 이들은 후에 훈구파가 되어 새로운 세력인 사림파와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고, 이는 조선 중·후기 역사의 폐해인 ‘당쟁’의 시초가 된다.
김종서는 ‘노산군일기’와 ‘세조실록’에 계속 역적으로 기록되었다. 공식적인 신원도 계속 미뤄진다. 세조를 이은 예종(8대), 성종(9대), 연산군(10대), 중종(11대), 인종(12대), 명종(13대)은 물론 방계인 선조(14대)도 중종의 7남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서 모두 세조의 핏줄이다. 광해군(15대)에 이어 집권한 인조(16대)도 세조의 핏줄이긴 마찬가지였다. 김종서의 신원은 자칫 세조 집권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에 늘 뜨거운 감자로 존재했다. 즉, 수양의 후예들이 계속 즉위하는 조정에서 김종서는 시대의 금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이 비정상으로 흘러도 진실은 그 스스로의 목소리로 살아남음을 역사는 말해준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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