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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 정길재] |
달의 사생아로 태어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써나가는 작가야. 네가 쓰고 있는 책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그건 원고인 셈이지.》
내가 포그를 만난 것은 웨스트 112번가의 허름한 아파트에서였다. 그날은 얼마 전 죽은 포그의 외삼촌, 빅터 포그가 유산으로 남긴 75개의 책 상자를 아파트로 옮겨오던 날이다.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지칠 대로 지친 포그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가장 낡은 상자 하나를 힘겹게 나르던 중이었다. 문을 열고 막 집안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상자를 묶고 있던 끈 하나가 스르르 풀렸다. 동시에 안에 있던 책이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포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지럽게 쌓인 책 더미 위에 주저앉았다.
“내 이름은 마르코 포그, 어머니는 에밀리 포그, 그리고 삼촌의 이름은 빅터 포그야….”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 도서관에 앉아 오래된 소설책의 책장을 넘기던 중이었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우리 세 사람의 이름은 모두 포그였지. 내 아버지는 오래전에 죽었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는 스물아홉 살에 보스턴의 어느 거리에서 버스에 치여 죽었지. 얼마 전 빅터 삼촌마저 죽어버렸으니 이제 난 완전히 혼자가 된 거야.”
가슴 밑바닥의 심연을 울리는 듯 공허한 음성이었다.
“남은 것이라곤 삼촌이 남긴 천 권이 넘는 책과 공상뿐. 하지만 난 외롭지 않아. 같은 글을 읽고, 같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어디서든 우리는 함께 존재하니까. 책은 우리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끈이지.”
그때 나는 비로소 책 더미에 묻혀 있던 다니엘 디포의 소설 속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거기 깡마르고 무표정한 얼굴의 한 청년이 우두커니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굶기를 밥 먹듯 했을 법한 속수무책의 뻥 뚫린 눈동자, 흐린 아침 같은 얼굴의 마르코 스탠리 포그였다.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그해 여름, 포그는 밀린 집세를 치르지 못해 아파트에서 쫓겨났다.
우리는 한참이나 거리를 걸어 도시의 허파라 불리는 한 공원 앞에서 멈춰섰다. 센트럴파크였다.
포그는 공원의 부랑자 생활에 놀랄 만큼 빠르게 적응했다. 어느 여름날 저녁,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커다란 바위 밑 동굴 같은 곳으로 기어 들어갔다. 포그가 옅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몸이 불덩이였다. 전날, 풀밭에 누워 잠을 자다 만난 폭우 탓이다. 오후부터 심한 고열이 치솟기 시작하더니 증상은 갈수록 심해졌다. 가끔씩 눈을 떴지만 거의 의식이 없었다. 그는 종종 알아듣기 어려운 헛소리까지 내뱉곤 했다. “저기 불빛이 보여, 달이야. 두 개의 달!”
나는 동굴을 가린 나뭇가지 사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칠흑같은 어둠뿐이다. “어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두 개의 눈동자야… 나를 보고 있어.” 나는 포그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포그, 정신 차려! 포그!” 잠시 후 포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포그는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았다. 두 개의 달처럼 두 사람의 동그란 얼굴이 동굴의 입구에 떠올랐을 때도 그는 기척이 없었다. 그들은 오랜 친구인 짐머와, 짐머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우연히 만난 ‘키티 우’라는 여학생이었다.
만일 그때 두 사람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포그는 그 움푹 팬 자연동굴 속에서 꼼짝없이 죽고 말았을 것이다. 특히 중국계 유학생인 ‘키티 우’의 지극한 사랑은 상실감에 빠진 포그에게 다시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것은 내게 있어 인간이 달에 착륙한 일 만큼이나 경이롭고도 신비로운 사건이었다.
태양은 과거고 세상은 현재고 달은 미래다
오랜만에 찾은 모교의 취업상담실 게시판에서 포그는 꽤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찾아냈다. 노인의 말벗을 해주는 일이었다. 숙식을 제공한다는 광고의 마지막 문구에 이끌려 포그는 곧장 노인을 찾았다.
뼈와 가죽만 남은 초췌한 모습으로 노인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장님이었다. 포그는 에핑의 시중을 들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느 날부터인지 에핑은 신문의 부고란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포그에게 미리 자신의 사망기사를 작성하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다. 다음날, 에핑은 그동안 한 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를 고백했다.
“원래 내 이름은 줄리언 바버였어. 1917년, 나는 사람들에게 잊혀졌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 난 한때 위대한 미국의 화가였다네.”
과거의 이야기를 시작한 순간, 에핑은 이미 줄리언 바버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1916년 풍경화를 그리러 서부로 떠났다고 했다. 잭 스코스비라는 안내인과 지질학자의 꿈을 갖고 있었던 바이런이라는 젊은이가 동행했다.
“드넓은 서부의 황무지는 많은 개척자들이 죽어간 거대한 무덤이었지. 이승 같지 않은 고요가 점령한 벌판에 오직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곤 심장 뛰는 소리와 혈관 속으로 피가 흐르는 소리뿐이었으니까.”
그들보다 나이가 많았던 스코스비는 무척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다. 블랙잭 게임을 하며 돈을 잃게 되자 스코스비는 악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일부러 일행에게 골탕을 먹일 요량으로 험한 지름길을 택해 길잡이를 했다. 가파른 절벽을 오르던 중 바이런의 말이 발을 잘못 디뎌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피투성이가 된 바이런은 이미 회복이 불가능한 만신창이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러자 스코스비는 바이런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에핑은 스코스비와 숨막히는 신경전을 벌이며 끝까지 바이런을 지켰다. 결국 스코스비는 혼자 떠나고 에핑은 바이런과 함께 황무지에 남았다. 온 정성을 다해 돌본 보람도 없이 사나흘이 지난 후 바이런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에핑은 산기슭에 바이런을 묻고 막막한 절망 속에서 울부짖었다.
“그때 난 미친 게 분명했어. 그 후로 사흘 동안 내내 소리를 지르며 내 손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얼굴에 바르고 황무지를 뛰어다녔으니까.”
《누구든 자기가 속수무책인 지경에 이르렀다고 느끼면 고함을 지르고 싶어진다. 가슴에 응어리가 지면 그것을 몰아내지 않고는 숨을 쉴 수 없는 법이다.》
수수께끼 같은 삶
그때 에핑에게 남은 일은 단 하나,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는 일 뿐이었다. 넷째 날 아침, 에핑은 우연히 근처 절벽 위에 있는 동굴을 발견했다. 마지막 힘을 그러모아 그는 절벽을 기어올랐다. 동굴 안은 크고 넓었는데 누군가 오랫동안 살아온 거처처럼 살림도구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거기다 침대에는 동굴의 주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의 시신까지 있었다. 살해된 것이 틀림없었다. 에핑은 시신을 묻어주고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목격자도 단서도 없는 사건이었다.
에핑은 그곳에서 과거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계획을 세웠다.
동굴에 머무는 동안 그는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그림을 그렸다. 오직 순수한 화가로서의 열정에만 사로잡혀 지냈다. 이듬해 예상했던 대로 동굴의 주인을 살해한 범인들이 돌아오자 에핑은 치밀하게 세운 계획에 의해 그들을 모두 사살했다. 그리고 범인들이 갖고 있던 돈을 수중에 넣은 후 다시 부유한 사업가가 되어 세상으로 돌아왔다. 이름까지 토머스 에핑으로 바꾸고 철저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우연한 사고로 에핑은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에핑이 긴 고백을 마치자 포그는 그 내용을 정리해 ‘줄리언 바버의 수수께끼 같은 삶’이라는 제목으로 원고를 완성했다. 에핑은 그것을 더 보충해 자서전으로 만든 뒤 자신의 아들인 솔로몬 바버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 녀석은 뚱뚱보에다 아이도 없고, 결혼도 안 했어. 철저히 몰락하고 실패한 인생이지. 뛰어난 머리와 재능에도 불구하고 삶이 긴 재난의 연속이었으니까. 계속된 불운으로 아무도 모르는 오지에서 인생을 탕진했지. 나는 자네가 그 녀석에게 내 자서전을 보내주었으면 해.”
인생이라는 대모험
에핑은 포그와 함께 도시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평생 동안 모았던 재산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남은 재산은 아들 솔로몬 바버와 포그에게 남겼다. 그런 후 자신이 죽을 것이라 예언한 날에 정확히 숨을 거두었다. 포그는 에핑의 유언대로 그가 대신 쓴 자서전을 솔로몬 바버에게 보내주었다.
솔로몬 바버는 한 이름 없는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로 있었는데 에핑이 이야기한 대로 뚱뚱한 대머리에 체구가 엄청나게 큰 거구였다. 두 번째로 포그를 만난 바버는 먼저 엉뚱한 제안을 했다. 에핑이 말했던 사막의 동굴을 찾아가자는 것이다.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동의를 했지만 포그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 탐험이 무모한 일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휴일 오후, 바버가 숲 속을 산책하는 모습을 보며 포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숨이 차서 10분도 못 걷는데 어떻게 그 험한 여행을 한다는 거야.”
나는 포그의 그림자를 밟고 서서 말했다.
“아버지를 찾는 일이니까. 지금 바버에게 그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 너도 알잖아?”
“그래, 알아. 하지만 헛소리야. 저 거대한 몸으로 사막의 가파른 계곡을 오른다는 건 말도 안 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목숨을 걸고서라도 찾아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은 어쩔 수 없어. 설사 벼랑에서 떨어져 뼈가 부서지고 머리가 깨지더라도 갈 곳은 가게 돼 있는 법이거든. 그게 우리 인간이란 존재의 운명이야.”
“아무리 그래도 난 이제 그런 무모한 도전 따윈 하진 않겠어.”
그러나 정확히 여덟 달이 지난 후 포그는 그 동굴을 찾아갔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것은 바버보다 포그에게 있어서 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키티가 임신을 하면서 모든 일이 어긋났다. 낙태를 반대했던 포그는 키티와 날카롭게 부딪쳤다.
“내 아기를 죽인다면 그건 나도 같이 죽이는 거나 똑같아!”
포그가 키티에게 남긴 마지막 인사였다.
결국 포그는 키티를 떠나 바버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바버는 상실감에 빠진 포그에게 다시 사막으로의 여행을 제안했다. 그 즈음에는 포그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런 소득이 없는 여행이라도, 부질없이 실패할 운명의 모험이라도,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무조건 떠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평생동안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은유,
늘 꿈꿔왔던 공허로의 도약이었다.》
이지러졌다 다시 차오르는 달처럼
두 주일 동안 계획을 세운 뒤 곧장 자동차를 구입해 출발했다. 일단 방향은 우회로를 택해서 포그의 어머니와 외삼촌이 묻혀 있는 묘지를 들렀다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글거리는 한낮의 태양 속에서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마치 아들과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부지런히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잠시 후 한 무덤 앞에 이르러 그들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얼마 후 어디선가 한 줄기 산들바람이 불어 왔을 때 나는 조용히 흐느끼는 한 남자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은 포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 앞에서 말문을 잃고 말았다. 바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잔잔한 흐느낌은 어느덧 격렬한 울음으로 바뀌더니 주체할 수 없는 통곡으로 이어졌다.
바버는 포그의 어머니인 에밀리 포그의 옛날 애인으로, 포그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 후의 일은 더 끔찍하게 전개됐다. 포그가 바버를 향해 팔을 휘두르며 분노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한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원망에 찬 절규가 천 개의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린 듯한 폭음을 내며 묘역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질끈 감은 눈을 떴을 때 바버는 비틀거리며 무덤들 사이를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태양은 중천에 떠올라 있었고 묘지 전체가 이상하게 작렬하는 섬광으로 번뜩였다. 바버는 몇 걸음 더 내딛더니 누군가 파놓은 무덤의 가장자리에서 중심을 잃고 무너졌다. 얼마 후 바버는 죽었다.
나는 포그를 따라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행을 시작했다. 포그는 종일 걷고 또 걸었다. 허허벌판에서, 동굴에서, 길가의 도랑에서 잠을 자며 우리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처음 며칠 간 포그는 고함을 지르며 울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계속 걷고 또 걷는 동안 포그의 울음소리는 잦아들었다. 나중에는 너무 잠잠해져서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침묵이 깊어갈수록 포그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우리는 한 낯선 마을의 해변에 서 있었다. 태양이 지고 곧 달이 떠오를 시간이었다.
“여기가 내 출발점이야, 여기가 내 삶이 다시 시작되는 곳이야.”
붉게 일렁이는 석양빛 속에서 포그는 처음으로 미소를 떠올렸다.
《한 집 두 집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다음에는 언덕 뒤에서 달이
떠올랐다. 달아오른 돌처럼 노랗고 둥근 보름달이었다.
나는 그 달이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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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Auster |
작가와 작품 소개
폴오스터는 1947년 미국 뉴저지 뉴어크에서 태어나 컬럼비아대학 문학석사를 취득했다.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초기에는 번역에 종사하며 주로 시와 평론을 썼다. 선원, 통계조사원, 강사, 전화교환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치면서 소설가로 데뷔하여 활동하기까지 남다른 삶의 굴곡을 겪었다. 1974년 시집 ‘폭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해 소설가로 크게 성공한 이후에도 극작가, 영화감독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세기 말의 이른바 해체의 서사, 불확실성의 서사를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는 작가로, 미국문화사 이면의 에피소드들과 현대 미국인 삶의 내용을 이야기의 소재로 삼는 특징이 있다. 운명적인 만남과 상징적 이미지를 결합시켜 마술과도 같은 환상적 리얼리티를 펼쳐 보이는 이야기 구성방식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문단과 전 세계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불러일으켜 이른바 ‘폴오스터 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작품으로는 1993년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한 ‘거대한 괴물’ 외에 뉴욕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장편소설 ‘유리의 도시’ ‘유령’ ‘비밀의 방’과 미국 예술원 모톤 다우웬자블상 수상작인 ‘우연의 음악’ ‘공중곡예사’ 등이 있고, 에세이집으로 ‘배고픔의 기술’, 시집으로 ‘실종’ 등이 있다.
옮긴이 황보석은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를 졸업하였으며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폴오스터의 ‘뉴욕 3부작’ ‘공중곡예사’ ‘거대한 괴물’ ‘달의 궁전’ ‘우연의 음악’ ‘고독의 발명’ ‘환상의 책’ ‘신탁의 밤’ ‘브루클린 풍자극’ ‘끌림 쌈긴의 생애’(막심고리끼), ‘백년보다 긴 하루’(친기즈 아이뜨마또프), ‘내 안의 프로방스’(피터 메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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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열린책들刊 |
‘달의 궁전’은 1960년대 후반 컬럼비아대학교를 졸업한 후 자발적 파산으로 부랑자가 된 마르코 스탠리 포그와 한 번의 삶을 말살하고 자신을 재창조한 노인 토머스 에핑, 비대해지는 육체와 반대로 더욱 작아져 가는 남자 솔로몬 바버 3대의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이들은 모두 삶의 극단으로 몰린 인생을 경험하면서 슬픈 운명에 이끌려 절망의 바닥을 겪은 후 다시 이지러졌다가 차오르는 달처럼 새롭게 자신을 점검하고 성장하는 인물들이다. 삼대의 이야기를 통해 20세기 초반부터 후반까지, 황무지로부터 뉴욕의 중심에 이르는 미국 전역의 풍경과 그와 함께 한 세 인물들의 인생사를 조망해볼 수 있다. 가상의 인물들이 빚어내는 이야기는 우연과 운명의 부딪침으로 인해 달라질 수 있는 천변만화하는 인생의 풍경을 보여준다. 공원, 사막, 달(우주)이라는 훌륭한 이미지의 장치를 통해 이들 인물들은 눈부신 스펙트럼을 발산하는 다면적인 캐릭터로 재탄생하고 있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의 구도가 있으면서 미국사 초기의 불완전한 이민문화와 뒤틀린 가족사를 통해 현대 미국사회의 병폐를 고발하고 있다. 또한 센트럴파크에서 부랑아 생활을 하는 포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에핑이 맨해튼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행위는 미국의 문명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자본주의에 대한 작가의 통렬한 비판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끝에 도달한 포그가 새롭게 의지를 다지는 마지막 장면은 모든 이들의 열려있는 미래, 의지에 의해 재창조될 수 있는 희망적인 세계의 메시지를 전한다.
[작품 속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
솔로몬 바버에게
아마도 내가 이 책을 사랑하게 된 것은 당신 솔로몬 바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진짜 친모라고 주장하며 왕 앞에 나온 두 여인들에게 아기를 반으로 자르겠다고 위협한 히브리의 왕, 솔로몬의 이름을 갖고 있었던 당신 솔로몬 바버는 그야말로 한 여인으로 인해 인생이 두 동강 난 비운의 남자였지요.
당신은 이 책에 등장하는 세 남자 중 맨 마지막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대머리인데다 160킬로그램의 비대증 환자로 매우 불편해 보이는 거구의 몸을 갖고 있는 당신은 지독히 운이 없는 남자였습니다. 영민한 두뇌와 예민한 감수성, 천재적인 학습능력을 갖고 있는 유능한 학자였지만 세상은 당신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실수 때문이었지요.
금단의 열매를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붉고 싱싱해서 단지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그 절정의 열매는 결국 당신의 인생을 파국으로 몰고 간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여자를 평생 기억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날의 재난이 있고 13년이 지난 후 그녀가 불귀의 객이 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당신의 눈에서는 쇳물 같은 슬픔이 흘러내렸지요.
당신은 이름 없는 변방의 대학을 떠돌며 살았습니다. 엄청난 장서와 양동이만한 모자, 토머스아퀴나스 책상-배가 들어갈 자리를 큼직하게 반원형으로 파낸-을 트레일러에 싣고 이 대학 저 대학으로 옮겨 다니며 오직 학문에만 몰두한 참된 지성으로서 성실한 인생을 살았지요.
그런 당신에게 갑자기 과거로부터의 날아온 몇 가지 소식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적잖은 유산, 그리고 당신을 꼭 닮은 아들 포그. 아들이라는 존재는 그간 당신의 인생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행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행운은 너무나도 빨리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치 하룻밤 어둠을 밝힌 만월이 금세 이지러져버린 것처럼 당신의 행복도 눈 깜짝할 새 추락해 버렸지요. 하필이면 누군가 파놓은 무덤 속으로, 예기치 못한 운명의 함정 속으로 당신의 거대한 인생이 떨어져버린 것입니다.
우연한 행복과 우연한 불행을 동시에 보여준 당신은 내가 책 속에서 우연히 만났던 존재의 광휘였습니다.
이제 알 수 없는 왕국의 왕이 되었을 당신, 솔로몬 바버에게 영원히 행복한 나날들만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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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Albert Blakelock 'Moonlig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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