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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무맥] (26) 주역의 팔괘를 무술화한 ‘팔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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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3-16 23:51:45 수정 : 2010-03-16 23: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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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을 그리면서 8가지 장법 구사… 공수전환도 자유자재로
한국과 중국과 일본, 동양 3국은 예부터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였고, 문화전통도 비슷한 데가 많다. 무술도 예외가 아니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문화를 공유하고 있으니 현재의 상황을 가지고 특정무술을 반드시 어느 나라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래서 실력으로 현재적 우위의 확인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신체적 조건이 비슷하고 상대의 무술을 쉽게 배울 수 있는 까닭으로 자칫하면 무술의 우위를 상대국에게 내줄 수도 있다.

◇팔괘장은 주역을 무술로 변형한 것으로 가장 변화무쌍하다는 평을 듣는다.
태권도만 하더라도 일본의 당수를 바탕으로 재창조한 것이고, 유도의 종주국인 일본은 한국에 맹주 자리를 내준 적도 있다. 태권도의 맹주를 중국이나 일본에 내주지 말라는 법도 없다. 무술도 글로벌화의 영향을 비켜갈 수 없다.

요즘 무예계에는 이런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권술이 첫째이고, 그다음이 도검과 곤봉이다(首爲拳術, 次爲刀劍棍也).”

이것은 무술의 역전을 말한다. 평화가 오래 지속됨에 따라 무기를 드는 쪽보다는 들지 않는 쪽으로 무술의 중심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적을 죽이는 살수보다는 호신술이나 건강과 의료에 기여하는 무술이 더 중요해졌다. 권법이 더 중요해지고 아예 볼거리를 위한 권희(拳戱)가 더 요구되고 있다. 그래서 무술의 공연과 시연이 어느 때보다 각광을 받고 있다. 이러한 때에 태극권(太極拳), 팔괘장(八卦掌), 형의권(形意拳) 등 내가(內家) 3권은 더욱더 각광을 받고 있다. 내가권은 모두 기(氣) 양생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내가권의 선두자리를 두고 앞으로 한·중·일 삼국에서 치열한 다툼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근대에 들어 내가권을 중국이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언제나 역전될 수 있는 상황이다.

태극도가 태극의 원리를 무술에 도입하였다면, 팔괘장은 주역의 팔괘를 도입한 무술이다. 팔괘장은 중국 배우 이연걸이 일인이역을 한 ‘최후일강(最後一强·The One)’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한 무술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선(善)한 ‘게이브’와 악(惡)한 ‘율라우’가 팔괘장과 형의권으로 대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율라우가 주먹을 위주로 반보씩 전진하면서 형의권을 펼치고, 게이브는 장권을 위주로 원을 그리며 부드럽고 화려한 팔괘장을 펼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안철균 관장이 상대와 대적할 때는 전광석화 같은 동작을 펼친다.
팔괘장은 64괘장으로 세분화될 수 있다. 몸의 원리와 마음의 원리, 삼라만상의 원리가 내재적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흔히 동양학의 공부를 가늠할 때 “주역을 뗐느냐”고 물어본다. 주역이 최고봉이기 때문이다. 무술에서 팔괘장이 그만한 자리를 차지할까 하는 의문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팔괘장을 마스터하면 무술의 최고수가 되는 것은 틀림없다.

팔괘장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60∼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 개항 이후 중국의 관문인 인천은 화교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자연스럽게 팔괘장의 고장이 되었다. 전설적인 팔괘장의 고수는 고(故) 노수전(魯水田) 노사이다. 지금은 그의 전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서인천 지하철 역에서 배다리쪽으로 10여분 걸어가면 네거리가 나오고 그 네거리 한 구석에 안철균(安哲均) 관장이 운영하는 ‘팔괘장’ 도장이 보인다. 그는 19살이던 1970년에 전대성(全大成) 선생에게 팔괘장을 배우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노수전 노사는 일선에서 은퇴한 뒤 간혹 도장에 들러 후배들의 자세를 잡아주는 정도였다.

“노 노사님은 1970년대만 해도 이미 칠순에 가까워서 제자들 앞에서 시연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도장 한편에 놓여 있던 유성표(流星標)라는 병장기를 들었어요. 긴 줄에 표창을 매단 무기인 유성표를 휘휘 몇 번 돌리는가 싶더니 오른발로 표창을 차내는데 표창은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10여m쯤 날아가 도장 벽에 박혔어요. 팔괘장의 고수였던 셈이죠.”

당시만 해도 팔괘장이 붐을 타던 때라 유능한 인재들이 속속 들어왔다. 그래서 인천 하면 팔괘장의 고장이면서 중국 무술이 가장 먼저 번창하고 터를 잡는 곳이었다.

팔괘장은 중국 청 왕조 말기 숙왕부의 총령을 지낸 동해천(董海川·1797, 1813∼1882) 기인(奇人)이 창시한 무술이다. 그는 당시 청조의 환관이었는데 아마도 궁중에서 전해오던 전통무술을 나름대로 재창조하여 팔괘장을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동해천 조사(祖師)가 무술을 전파하기 시작한 1850년대는 북경에 팔괘장 열풍이 불었다. 당시 마침 태극권도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던 터라 어느 무술이 더 강하고 센지 일반의 관심이 쏠렸다. 그래서 천하무적이라고 알려진 양노선(楊老仙) 태극권사와 동해천 조사는 대결을 벌였는데 며칠을 싸워도 승부를 가릴 수 없어 서로의 장점을 배우기로 하고 끝을 맺었다고 한다. 동해천 조사의 제자 정정화(程庭華)는 또 그의 친구이자 형의권 최고수로 통하던 곽운심(郭雲深·1829∼1900)과 3일간 혈투를 벌였으나 역시 승부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팔괘장은 이 대결로 인해 일약 최고 인기무술로 자리 잡았다.

팔괘장의 요체는 피정타사(避正打斜), 다시 말하면 상대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기보다는 그것을 피하고, 원을 그리면서 사각의 허점을 노린다는 뜻이다. 마치 권투의 아웃 파이터와 같다. 이때 걸음걸이는 진흙탕을 걷는 요령으로 발을 높이 들지 않고 약간 끌듯이 하면서 번갈아 평행으로 내딛는다. 이것이 소위 창니보(猖泥步)이다. 물론 행보는 흐르는 물과 같고 운신은 물살을 헤치는 용과 같이 해야 한다. 먼저 머리가 방향을 틀면 몸통과 꼬리가 그 동선을 유영하듯이 따른다.

팔괘장은 동해천 조사 이후 8개 문파로 갈렸다. 1대 동해천에서 2대 양진보(梁振浦), 3대 이자명(李子鳴)으로 이어졌는데 이자명의 제자 중에서 정정화(程庭華)의 정파(程派)와 윤복(尹福)의 윤파(尹派)가 현재의 핵심이다. 정파는 치고 넘기는 것이 장기이다. 마치 씨름에 비할 수 있다. 윤파는 찌르고 자르고 꺾고 차는 것이 장기이다. 그래서 소림권 출신이 많다. 현재 양파(梁派), 번파(樊派), 마파(馬派), 송파(宋派) 등이 있다. 1차 팔괘장의 도입기를 거쳐 2차로 팔괘장의 붐이 인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중국이 올림픽을 열기 위한 전단계로 아시안게임을 개최하려고 준비할 즈음, 우슈(쿵후)가 아시안게임 종목으로 채택된다는 소문이 일고부터이다. 한국도 우슈 선수를 출전시켜야 하기 때문에 경기단체를 구성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태권도를 올림픽 종목으로 넣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중국의 아시안게임에 우슈 선수를 출전시키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대한우슈협회를 조직할 목적으로 팔괘장을 비롯하여 중국무술 조직을 점검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사단법인 대한쿵후협회, 인천에는 사회단체 한국쿵후협회가 있었고, 대만이 중심이 된 중화 국술 쿵후 국제연맹총회가 있었다. 그리고 수도권과 지방에 한중 쿵후 무술협회, 국제 쿵후연맹 등이 있었다. 1990년 제11회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이에 대비한 대한우슈협회가 89년 1월에 탄생한다. 이어 89년 2월에 대한체육회 준가맹 단체가 되고, 92년 2월에 정가맹이 된다. 현재 우리나라에 소개된 중국 무술은 과거로부터 비전되어 오던 전통무술이 있고, 이를 현대 경기종목으로 재구성한 무술이 있다. 말하자면 대한체육회 산하에 가맹경기단체로 들어온 것이 바로 대한우슈협회이다.

경기단체가 되면서 중국 우슈는 전통무술로서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태권도가 무술 본래의 모습을 점차 잃어가는 것과 같다. 시대적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경기종목화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면서도 전통무술로서의 전통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 또한 무술인들의 과제이다. 이는 비단 우슈만이 아니라 모든 무술의 운명이다.

안 관장은 대한우슈협회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해서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그는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인천 바닥에서 익힌 팔괘장의 현주소를 알아보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중국을 찾았다. 그때 이자명 북경팔괘장연구회 회장을 만났다. 이 회장은 당시 연로하였지만 안 관장의 무술시범을 보고 비범하다고 칭찬하면서 말했다.

“내 인생에 마지막 사업으로 제자를 받겠다.”

안 관장은 중국 팔괘장의 4대 전인으로 인정받은 뒤 북경 향산 만안공묘에 있는 동해천 조사의 묘소를 찾았다. 이에 앞서 안 관장은 팔괘장 손지군(孫志君) 대사와 함께 동해천 조사를 비롯한 정정화(程廷華)·정유생(程宥生) 등 노사에 대한 배사식(2006년 4월30일)을 행하였다.

중국 팔괘장은 해(海), 복(福), 수(壽), 산(山), 영(永), 강(强), 의(毅)의 순으로 대호(代號) 돌림자를 쓰면서 내려왔다. 그래서 안 관장은 인천에서 배운 것으로 보면 7대이지만 중국 쪽에서 보면 4대여서 하는 수 없이 의산(毅山)이라는 이름을 쓴다.

그후 여러 차례 중국에 다니면서 이공성(李功成)·마전욱(馬傳旭) 등 이자명 회장의 여러 사형들과 교류하면서 실력을 배양해 왔다. 지금은 중국 팔괘장의 어떤 사람과 겨루어도 뒤지지 않는 실력과 자신감을 갖추었다. 현재 그의 제자로 김성호·김성익·박종진 등 여러 명이 있다.

“태극권은 제자리에서 좌우로 움직이는 동선이 있어요. 팔괘장은 원을 그리는 동선이 있고, 형의권은 직선으로 들어가는 공격 형태를 취합니다. 팔괘장을 하는 사람은 형의권을 반드시 해야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어요. 이는 마치 권투선수가 어느 것을 주로 하더라도 인파이팅과 아웃파이팅을 모두 익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팔괘장은 원으로 걸으면서 장을 돌린다. 천(穿), 환(換), 개(開), 합(合), 개(蓋), 도(挑), 핍(逼), 연(硏)의 여덟 가지 장법(掌法)을 구사한다. 이에 비해 형의권은 벽(劈), 찬(鑽), 붕(崩), 포(砲), 횡(橫)의 다섯 가지 권법(拳法)이 각각 변환하면서 관통한다. 형의는 오행생극에서 뜻을 취하고 팔괘는 음양생화에서 이치를 얻은 것이다. 형의권은 종적인 힘을 자유롭게 운용하는 데에 그 정수가 있다. 상대의 공격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 막고, 나의 공격은 아래에서 위로 치는 것이다. 팔괘장은 횡적인 힘을 자유롭게 운용하는 데에 그 정수가 있다. 횡적이란 결국 원을 그리면서 돌게 되는데 여러 장을 부챗살처럼 펼치면서 상대를 공격하고, 상대의 공격은 원으로 돌면서 피한다.

팔괘장은 평원횡절(平圓橫切)을 모토로 삼고, 공격 시에는 직접 급소에 나아가고, 방어 시에는 원을 따라 돌면서 물러나 은밀한 곳에 숨는다. 공수의 전환이 자유롭다. 형의권은 입원정절(立圓正切)을 모토로 삼아 정중(正中)의 선에서 극치를 이룬다. 형의권은 명문(命門)을 지키는 데 주력하며, 열두 가지 동물을 흉내낸 12형권을 익히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팔괘장은 단전을 지키는 데 뜻을 두어 물처럼 움직이며 들어가지 않는 데가 없다. 형의권은 보를 바르게 하여 직진하고 손은 명치의 중앙을 떠나지 않는다. 팔괘장은 비스듬하게 옆으로 비껴지나 비스듬한 중에 바른 것이 깃들어 있다.

팔괘장이야말로 ‘움직이는 선(禪)’이라고 안 관장은 말한다. 먼저 숨을 들이마시고 뒤에 숨을 내쉬는 것부터 시작해서 오르내리고, 밀고 당기고, 열고 닫고 하는 동작이 모두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제대로 무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양자강을 중심으로 남권북퇴(南拳北腿)라는 말이 있다. 남쪽은 기후가 더운 탓으로 열을 덜 발산하는 주먹 중심이고, 북쪽은 추우니 열을 많이 발산하는 발차기 중심이라는 뜻이다. 무술도 자연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북이라고 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산동(山東) 당랑권, 화북(華北) 팔극권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지방에 따라 주로 하는 무술이 다름을 말한다. 이는 풍토와 체질, 그리고 전통을 함께 고려해서 하는 말이다.

“장(掌)이라는 것은 놀랍습니다. 능숙하게 숙달만 되면 주먹은 쓸 필요도 없어요. 빠른 보법으로 상대를 교란한 뒤 은보(隱步)로 접근하여 팔괘장을 신출귀몰하게 쳐낼 수만 있다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태극권이 이정제동(以靜制動)이라면 팔괘장은 이동제정(以動制靜)이다. 팔괘장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움직일 때는 용과 같으며, 회전할 때는 원숭이처럼 하며, 자세를 변환할 때는 매처럼 하며, 낮추었을 때는 호랑이가 앉아 있는 것처럼 한다.

안 관장은 무술인 가운데 가장 다른 무술의 교차수련을 포용하는 편이다.

“그동안 무술계의 불문율이 다른 문파의 무술을 배우지 않는 것, 불학타문지예(不學他門之藝)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고수할 수 없습니다. 다른 무술도 훌륭하면 얼마든지 배워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우슈도 한국의 무술계가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우리의 문화자산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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