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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56) 조선시대 노비의 삶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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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2-23 23:25:29 수정 : 2010-02-23 23: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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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간 노비들, 그들은 왜 그 험난한 길을 선택했나
최근 조선시대 최하위 신분층으로서 심한 차별을 받았던 노비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노비에 대한 관심 증대의 일등공신은 바로 드라마 ‘추노(推奴)’. 도망간 노비에 대한 뜨거운 추격전이 시청자의 관심을 끌면서 조선시대 노비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받는 경우도 많아졌다. 노비는 언제부터 존재했으며 조선시대 노비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리고 그들은 왜 도망의 길을 선택한 것일까?

◇드라마 ‘추노’에서 도망친 노비들이 추노꾼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장면. 조선시대 법전은 ‘도망친 노비를 신고한 자에게는 노비 4명당 한 명을 상으로 준다’고 규정하고 있어 드라마에서처럼 노비를 뒤쫓는 추노꾼들이 생겨났다.
#1. 전쟁포로나 채무자, 범죄자가 노비의 시작

한국의 역사에서 노비제는 기원전 20년 이전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비의 역사는 적어도 2000년이 넘는 것이다. 노비제가 고조선시대부터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고조선의 ‘8조법금(法禁)’이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규정은 고조선시대에 이미 사유제산제도와 아울러 노비제도가 성립했음을 보여준다. 국가 간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고대사회에서는 전쟁포로들이 주로 노비가 되었다. 고대에 전쟁이 빈번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노비를 확보하는 것에 있었고, 전쟁은 다수의 노비를 한꺼번에 확보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전쟁노비 이외에도 채무자나 범죄자가 노비가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정복전쟁이 사라지면서 전쟁노비는 소멸되었다. 전쟁노비가 사라지면서 노비의 절대다수를 충원시킬 수 없게 되자, 왕실과 귀족 등 지배층은 노비 충원 제도를 달리 고안했다. 노비 신분을 대대로 세습시키는 법, 이른바 노비세전법(奴婢世傳法)을 만든 것이다. 노비 신분을 세습시켰기 때문에 노비는 신분에서 벗어날 길이 막혔다.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보관 중인 고려시대 노비첩. 수선사(송광사) 주지 원오가 1358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노비를 대장경 수호를 위해 절에 바친다는 내용이다.
고려시대에도 노비제도는 이어졌다. 고려시대에는 법제적으로 자유로운 공민(公民)인 양인(良人)과 재산처럼 매매, 상속, 증여가 되는 천인(賤人)으로 나누어졌다. 천인의 대다수는 노비가 차지했다. 노비는 노비끼리만 혼인할 수 있었고, 부모 중 한 사람만 노비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남자 노비는 머리를 깎고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어 복장에서도 양인과 구분을 했다. 그러나 주인이 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것을 금지하여 어느 정도의 인권을 보호하였으며, 때때로 군인으로 선발되어 출세의 길을 걷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조치도 있었다. 공민왕은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권세가들이 불법으로 차지한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고려시대의 노비는 국가기관에 소속된 공노비(公奴婢)와 개인에게 소속된 사노비(私奴婢)가 있었다. 노비는 주인을 위하여 농사일, 땔감 조달, 수공업품의 제작, 가사노동 등을 수행하였다. 노비는 주인과 함께 사는 경우 솔거(率居)노비라 하였으며, 주인과 떨어져 사는 경우 외거(外居)노비라 하였는데, 외거노비는 독립된 가옥과 약간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2. 조선시대 노비는 부가가치 높은 으뜸 재산

15세기 조선사회의 기본적인 신분 구조는 양천제(良賤制)였다. 권리와 의무가 있는 양인과 권리가 없는 천인(賤人)으로 구분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이후 양인의 최상부인 양반과 중인(中人), 상민(常民) 평민의 신분 구분이 이루어져 천민과 함께 4대 신분으로 고정되었다. 양반이 가장 권리가 많은 신분이었다면, 바로 그 반대편에는 의무만 많았던 천민이 있었다. 조선시대 천민으로는 노비 외에도 백정·광대·사당·무격·기녀·악공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에는 양인이었다가 사회적으로 천시되는 직업에 종사하면서 점차 천민으로 간주된 사람들이었던 반면에 유일하게 노비만큼은 처음부터 천민이었기 때문에 최하위층의 대우를 받았다.

노비는 그를 소유한 주인의 재산과도 같아서 매매, 양도, 상속의 대상이었다. 조선시대 재산 상속에 관한 고문서를 보면 아들과 딸에게 상속할 노비 수가 기록되어 있다. ‘경국대전’에도 노비에 관한 규정은 형전(刑典)에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노비는 처벌 대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노비는 젊고 건장할수록 비쌌다. 늙은 노비는 말 한 필 값에도 못 미쳤다. 양반으로서는 각종 일을 모두 할 수 있는 노비의 부가가치가 높았다. 조선의 양반들은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소생은 무조건 노비가 되어야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노비를 증식해나갔다.

노비는 조선의 어떤 신분보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었지만 주인이 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것은 금지되었으며, ‘경국대전’에는 노비가 출산하면 출산 전 30일, 출산 후 50일의 휴가를 규정하였다. 그 남편도 산후 15일의 휴가를 주었다. 외거노비는 주인 땅 일부를 경작하여 수확물을 바치고 남는 것은 자신의 재산으로 할 수 있었다. 공노비는 좁은 기회이긴 하지만 유외잡직(流外雜織)이라 불리는 하급기술직에 종사하여 물품의 제조나 책 인쇄, 요리, 바느질, 말 기르기 등 잡일을 하였다. 노비 중에서도 성공시대를 연출한 경우가 있었다. 중종 때 재상집 노비였던 반석평(潘碩枰)은 주인의 후원을 받아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조선중기 서기(徐起)는 노비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제자백가의 학문과 이론에 통달하여 사후에 공주의 충현서원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 노비 관련 문서. 글을 모르는 노비들은 자신의 손 모양을 그려넣어 수결(일종의 서명)을 대신했다.
조선시대의 노비는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뉘었다. 노비의 상전이 왕실 및 국가기관일 경우는 공노비, 개인일 경우는 사노비라 했다. 공노비는 중앙관청, 지방관청, 내수사, 궁방 등에 소속된 노비로, 신역(身役:노역)을 제공하거나 신공(身貢:물품)을 바치는 노비였다. 조선 초기의 공노비 수는 ‘성종실록’(성종 15년 8월)의 기록에 ‘추쇄도감(推刷都監:의무를 다하지 않고 도망간 노비를 찾아내는 일을 맡아 임시로 설치한 본부)에서 아뢰기를, “추쇄한 서울과 지방의 노비는 모두 26만1984구이고, 여러 고을과 여러 역(驛)의 노비는 모두 9만581구입니다”라고 하여 노비 수가 35만여명에 이르렀음을 보고하고 있다. 당시의 인구 대비 공노비는 전체의 10% 정도였으며, 사노비의 수까지 고려하면 조선시대 노비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3. 도망 노비가 발생하는 까닭은

그러나 노비는 해야 하는 일의 의무만 있었을 뿐 권리라고는 없었다. 조선시대 노비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물건이나 가축과 같은 재물이었다. 특히 사노비는 공노비와는 달리 그들을 직접 구속하여 통제했기 때문에 신분적 예속이 더 심했다. 사노비는 주인의 소유물로 철저히 지배당하고 있었고, 국가의 공권력도 노비의 인권까지는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노비가 주인을 구타했을 경우 무조건 참형이었다. 주인의 친족이나 외조부모를 구타한 노비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노비가 과실로 주인에게 상처를 입혔을 경우에는 장형 100대, 유형 3000리의 중형에 처해졌다.

비단 주인에 대해서만 열악했던 것이 아니었다. 노비와 평민 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법률은 노비에게 일방적으로 가혹하게 적용되었다. 이처럼 열악한 처지였기에 주인이 심하게 수탈하면 노비는 도망을 가거나, 심한 경우 주인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재산이 도망가는 것을 국가건 양반이건 방치하지 않았다. 법전에 ‘노비를 신고한 자는 매 4구에 1구를 상으로 준다’고 규정하였고, 드라마에서처럼 노비를 쫓는 ‘추노’가 생겨났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사건 수십건이 기록되어 있다. 1556년(명종 11) 4월 원주 노비 복수(福守)는 주인 원영사 및 그 가족 5명을 죽였는데 뱃속의 아이까지 꺼내 죽였다. 당연히 노비 복수는 극형에 처해졌고 원주의 관리까지 처벌하였다. 숙종 대에는 살주계(殺主契)가 조직되어 조직적으로 주인을 살해하는 사례도 있었다.

주인을 살해한 노비에 대한 국가의 대응은 단호했다. 주인과 노비의 관계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속살해나 그 이상의 중죄로 보아 극형에 처했다. 뿐만 아니라 해당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수령을 파면하고 읍격을 낮추었다.

조선 후기 도망 노비가 많이 생긴 것은 도망 노비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조선의 사회경제적 토대가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연고 지역을 이탈하면 다시 갈 곳이 없었지만, 조선 후기 도망 노비들은 섬, 광산, 목장 또는 상업이 발달한 도시, 변경인 서북지방 등으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 고용노동에 종사하거나 장시 등에서 상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도망 노비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양인 신분으로 행세했다. 경제력을 향상한 노비는 양반의 후예임을 모칭(冒稱)하기도 했다.

#4. 후기로 갈수록 신분제도 완화돼

◇조선 말기 사진. 양반 마님이 나들이를 떠날 때 가마꾼들이 동행하고 있다.
도망 노비들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국가의 고민이었다. 그만큼 국가의 노동력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1655년(효종 6) 1월에는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하고 도망간 노비를 본격적으로 조사하였다.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노비 명부에 등록된 공노비 19만명 중에서 신공을 바치는 자가 2만7000명밖에 되지 않은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각 도에 어사를 파견하여 도망 노비를 찾아 나섰고, 자수하는 노비는 이전의 신공을 면제해 주었다. 효종 8년까지 거행된 추쇄 사업 결과 42만7000여명의 노비가 확보되었다. 효종은 노비 추쇄사업을 마무리하고 그 결과를 ‘추쇄도감의궤’로 제작하였다. 의궤로 남긴 것은 노비의 추쇄를 국가 중대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노비에게 가해지던 신분적 제약이 상당히 완화된 데다가 합법적으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임진왜란은 노비의 신분 해방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임란 후 국가는 재정 보충을 위해 일정한 금액을 국가에 납부하면 노비 신분을 면해주는 납속책을 광범위하게 시행했다. 재력 있는 노비는 국가에 돈을 내고 노비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 영조 때 이인좌의 난과 같이 역모 사건에 공을 세운 노비가 신분에서 벗어나는 사례도 있었다.

전란이나 반란 때의 공헌, 경제력의 상승으로 신분 해방을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국가나 주인의 압박이 심한 경우 노비는 도망으로 신분해방을 꾀했다. 주인이 사는 곳에서 멀리 도망가서 신분을 감추고 살다가 양인으로 사칭했다. 조선 후기에는 도망 노비가 급증했으며, 이것은 조선의 노비제도를 붕괴시킨 주요한 원인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마침내 노비제도가 폐지되었다. 노비제도의 폐지는 단순히 노비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제 자체의 폐지였으며, 신분제의 폐지는 한국 사회가 근대국가로 성장하는 길이었다.

전통시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소외받은 계층 노비들의 삶이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선보이는 것은 반갑게 여겨진다. 노비의 삶과 역사에 대한 학계의 관심과 심층적인 연구들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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