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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이창호의 불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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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1-18 20:36:05 수정 : 2010-01-18 20:3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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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선 이기고 지는 일이 다반사다. 그보다 더 격한 승패가 어우러지는 곳은? 바둑판이다. 삶과 죽음이 끝없이 교차하고 온갖 수가 난무한다. 바둑은 그래서 한편의 드라마나 인생으로 비유되곤 한다. 군사·스포츠 지도자나 정치인이 바둑을 즐겨 찾는 것도 대개 그런 이유다.

축구 국가대표 허정무 감독은 바둑 애호가다. 선수에게 다른 오락은 금지해도 바둑만은 허용한다. 녹색 필드와 노란색 나무판에서 펼쳐지는 전술전략이 흡사하다고 보는 것이다. 가끔 ‘묘수’가 불현듯 솟구치면 얼굴색이 달라진다. 딱 ‘한수’다. 그 한방에 상대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판을 접고 만다. 으와! 엔돌핀이 팍팍 돈다.

바둑판에선 ‘죽은 돌(死石)’, ‘버려진 돌(捨石)’도 무섭다. 홀대했다간 큰코다친다. 어느 순간 부활해 대마를 위협하는 그 기세는 명불허전이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겼다고들 하지만 공명은 분명 죽은 사람이었다. 폐석이 살아 숨 쉬는 건 바둑 말고 또 어디 있을까.

바둑 용어는 현란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아생 연후 살타’ ‘젖히면 뻗어라’ ‘바둑에 져도 패는 이겨라’ ‘중앙 빵 때림은 50집’ 등 수도 없다. 승패 표현도 신승, 낙승, 완승은 기본이고 전쟁·스포츠에 없는 개념인 불계승, 불계패도 있다. 불계(不計), 말 그대로 집 계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축구는 0-10으로 지고 있어도 도중에 공 걷어 차고 필드를 떠날 수 없다. 그랬다간 출장 정지 등 가혹한 페널티가 주어진다. 하지만 바둑은 돌 던지면 그만이다. 오히려 그것은 아름다운 기풍으로 각인된다. 카메라 불러 놓고 돌을 접는 호쾌한 기사도 있다.

세계 바둑 최정상 이창호가 그제 돌을 던졌다. 그것도 17세의 아마 강자에게 96수 만에. 숱한 패배가 있었지만 아마에게 진 것은 대이변이다. 11세에 프로로 입문해 국내외 기전 최대 13개 타이틀 석권, 승률, 다승, 최다대국, 연승 기록 등 신화적 존재가 그렇게 무너지니 실감이 안 난다. 로마제국 붕괴, 칭기즈칸 몽골의 패퇴에 버금가는 듯하다. 이창호의 불계패, 쓴약이 되었으면 한다. 서른다섯에 신화를 접는다면 너무 아쉽다.

조민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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