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난정… 관비의 딸로 정경부인에 올라
윤치호… 조선 최초의 유학생 근대화 선구자 서얼(庶孼)-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이한 지음/청아출판사/1만3000원
조선시대 서얼들의 역사는 ‘해바라기 역사’, 즉 ‘규사(葵史)’라고 불린다. 신분제도의 사슬에 얽매여 이루지 못할 꿈에 생을 바쳤던 서얼들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선조가 다음과 같이 답을 내린 데서 나온 뜻이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는 것은 본가지든 곁가지든 가리지 않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는 것이 어찌 적자여야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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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 지음/청아출판사/1만3000원 |
조선시대 양반 아버지와 양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庶子)와 천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孼子). 이 둘을 합쳐 부르는 서얼은 태어나면서부터 하자가 있는 ‘결격품’이었다. 장원급제를 해도 서얼은 서얼일 뿐이었다. 성균관에 행차한 성종이 개최한 특별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한 최서. 태종·세종 때의 관리 우균의 서손이었던 최서는 어사화를 꽂고 임금이 내리는 술잔을 받았지만 누군가가 신분이 천하다는 상소를 올린 이후 주변의 시기와 방해에 시달렸고, 끝내 한미한 벼슬에 그치며 울분을 삼켜야 했다. 하지만 운명에 순응하는 대신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과 싸운 서얼들도 많다. 서얼로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 여러 임금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갈아타기의 귀재’ 유자광, 불우한 처지를 묵묵한 학구열로 반전시킨 이덕무 등은 시대의 개혁가였다.
여러 문헌과 야담들을 종합해 지은이가 추적해 낸 서얼들의 신분위조 사례는 학력위조 광풍이 대한민국에 몰아닥쳤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명종 3년, 반성위 강자순의 첩손이던 강응주는 이름을 문우라고 바꾸고 과거시험을 본 일이 발각돼 당사자는 물론 위조사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등록한 관리까지도 함께 처벌받았다. 시인이자 서예가로서 조선의 4대 명필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양사언도 문과에 급제했으나 서자이면서 신분을 위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양민 출신이었던 양사언의 어머니가 청주양씨 가문에 소실로 들어갔고, 남편이 죽자 쫓겨나 천한 신분인 것이 드러날까봐 곧바로 자결했으며 이로써 양사언은 양반이 돼 과거에 급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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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여인천하’의 한 장면. 강수연이 연기한 정난정은 서얼녀로서 정경부인에까지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첩에서 정실부인으로 신분이 상승하고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적자의 지위를 물려주는 ‘신분세탁’의 달인이자 운명의 개척자였다. |
때로 결핍은 에너지가 되기도 했다. 윤치호가 조선 최초의 외국 유학생으로 근대화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서출의 신분 덕분이었다. 양반 가문의 적자라면 과거라는 ‘열린 문’으로 나가면 될 뿐, 위험하고 낯선 외국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던 시절, 적서차별의 땅 조선에서는 희망을 품을 수 없었던 윤치호는 유학을 통해 한국 역사상 최초의 글로벌 인재가 됐다. 하지만 비뚤어진 ‘힘에 대한 숭배’로 인해 윤치호는 일본이 정한 ‘한일병합 기념일’에 그의 동네에서 유일하게 일장기를 게양하는 친일파로 변절했다.
하지만 책이 주인공들의 개인적 성취와 좌절에 집중하느라 적서차별 철폐 등 시대개혁에 기여한 면모를 조명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점은 아쉽다. 책 말미에는 조선시대에 다양한 각도에서 제기됐던 서얼 허통(許通)에 관한 논의와 함께 시대별 서얼들의 목록이 부록으로 실렸다.
김은진 기자 jisland@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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