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예진(27)이 일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인기소설 ‘백야행’을 읽은 것은 2년 전쯤이다. 신생 영화제작사가 판권을 사자마자 연쇄살인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비극적인 인물 유키오 역을 “꼭 손예진이 해줬으면 좋겠다”며 책을 보냈다. 온 몸에 전율이 일었고 운명처럼 끌렸다. 오랫동안 시나리오가 나오고 감독, 배우, 투자자가 정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의욕만큼 부담도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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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예진은 “과거의 상처를 딛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이 더욱 처절한 느낌을 주는 미호의 내면 풍경을 표현하느라 상당히 힘들었다”면서 “예전엔 의욕만 많이 앞섰는데 이젠 여유를 가지면서 한 단계 한 단계 깊어지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남제현 기자 |
개봉 전 ‘백야행’은 충무로 톱배우 손예진의 노출 수위로 화제를 모았다. 손예진은 미호의 몸이 그의 상처와 감정, 운명을 가장 온전하게 전달하는 매개라고 생각해 선뜻 벗었지만 노출 수위에만 맞춰지는 관심은 아쉽고 속상하다. 그는 “영화 홍보 등 불가피한 측면은 이해하지만 배우도 여자인데 당연히 부담스럽고 속상하다”면서 “‘얼마나 벗었냐’보다 ‘무슨 감정으로 벗었냐’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예진은 미호가 알몸으로 요한에게 성폭행당한 약혼자 딸을 꼭 껴안는 장면을 “가장 중요해서 가장 어려웠고, 그래서 촬영이 끝난 뒤에도 아쉬움이 가장 많이 남는 신”으로 꼽는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과거의 상처까지 들춰내 이용할 줄 아는 잔혹스러운 모습과 그럼에도 그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않은 미호의 또다른 모습을 표현해 내야 했기 때문이다.
“미호의 비극적인 운명이 도드라지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어요. 결혼을 위해 약혼자 딸을 희생시켰

클로즈업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는 스물여덟의 맨얼굴과 속살이 “미호의 흔들리는 표정을 생생하게 담을 수 있어 좋았고, 삶의 희로애락을 좀더 깊이 있게 보여줄 수 있어 배우로선 더욱 단단해질 수 있는 기회였다”고 반기는 손예진. 2001년 데뷔 이후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세월은 오해와 상처, 좌절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과 자부심을 더 많이 안겼다.
무엇보다 “관객의 심장을 울리는 좋은 연기는 배우의 진심을 통해 발현되는 것일 테고, 좋은 배우는 결코 자기 연기·생각에 갇혀서는 안 되는 것 같다”는 지혜를 터득케 했다.
“인간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과 연기자로서 성숙해지는 것은 다른 차원이잖아요? 어릴 때는 의욕만 너무 앞섰던 것 같아요. 다행히 ‘배우란 게 이런 거구나’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으니 지금부터는 배울 것은 배우고, 감수할 건 감수하고, 갖고 가야 할 것은 갖고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조금 더 깊어지고 싶어요.”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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