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하는데 교복을 입은 소녀가 골목을 지나다 발걸음을 멈춘다.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한참을 기웃거리던 소녀가 이내 묻는다. “저 분 ‘왕의 남자’에서 왕으로 나왔던 분 맞죠?” 촬영에 응하던 그가 환한 미소를 보내며 반긴다. 영화 ‘왕의 남자’의 광기 어린 군주에서부터 ‘즐거운 인생’의 실직한 40대 가장 역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 냈고, 지난해엔 ‘바람의 나라’로 드라마까지 영역을 넓히며 자신의 연기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정진영이다.
![]() |
◇연극무대에 나선 건 벌써 20여년 전이다. 1999년 ‘약속’으로 영화에 데뷔해 연기를 업으로 삼은 기간만 쳐도 10년을 채운다. 정진영은 연기를 “현재 나의 직업이자 내 삶의 중요한 근간”이라며 “비유하자면 가족과 같은 게 돼 버렸다”고 규정했다. 연기를 하지 않는 동안에는 서울 마포에 마련한 ‘그만의 공간’에서 운동과 책을 읽으면서 다음 연기를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보낸다. 이종덕 기자 |
1997년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태원 살인사건’은 애초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시작된 작은 영화였다. 그러다 정진영과 장근석의 출연이 확정되고, 비극적인 실화 자체가 궁금증을 유발했다. 예고편의 역동적인 영상과 강렬한 이미지의 포스터가 또 한번 화제를 일으키며 개봉 규모가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정진영은 “처음엔 완성이 목표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복을 많이 받았다”면서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고, 고인의 은덕도 입은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진영은 “이야기에 힘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죽은 자는 있으되 죽인 자는 없는 상황. 이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일어났던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이라는 공간 자체가 우리 사회의 축도가 아니냐는 감독의 말에 공감했다. 그는 “기소한 용의자는 결국 무죄가 됐다.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들른 한 청년이 아무 이유 없이 죽었는데,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며 “어디 그런 일이 한둘인가”라고 반문했다. 그가 “어떤 의미에선 ‘박 검사의 실수담’이자 일종의 반성을 촉구하는 영화”라고 말한 것은 그런 뜻에서다.
그가 연기한 박 검사의 시선은 관객의 시선과 일치한다. 두뇌 싸움을 걸어오는 2명의 용의자 가운데 진범을 찾아내야 하고, 빈약한 증거와 엇갈리는 증언에 휘둘리고 혼란스러워한다. 실제 검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취조실을 견학하면서도 사건기록을 들춰가며 깊숙이 알려고 하지는 않았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진영은 “사건을 다 알게 될 경우 자칫 빠질 수 있는 오류를 경계했다. 그러면 관객의 입장에서 시나리오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면서 “연기의 측면에선 감정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나직나직하게 가야 했다. 수사 과정의 요소요소에 감정을 묻혀 나가는 정교함이 필요했다. 이번 작업은 그런 점들이 어려웠고, 또 재밌었다”고 말했다.
용의자 중 1명인 피어슨 역을 맡은 장근석과의 호흡은 ‘즐거운 인생’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장근석의 합류가 정진영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는 후문에 대해 “편한 선배라고 해서 (장근석의) 선택에 부담을 주면 안 된다고 여겼기에 먼저 전화를 한 적도 없다”고 손사래쳤다. 그는 “장근석이 출연을 결정한 뒤 ‘고맙다. 잘해보자’고 격려했고, 낯선 현장과 감독의 스타일에 대해 조언해 줬을 뿐”이라며 “정말 열심히 잘해줬다”고 말했다.
그는 “연기할 때의 과정 자체를 즐기는 편이다. 과정이 좋으면 족하다”고 말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규모가 커져 버린 영화에 대한 부담감이 없는 건 아니다. 예고편에서 할리우드식 스릴러의 인상을 받거나, 감독의 이력 탓에 선동적인 영화로 비쳐질까 우려도 된다.
그는 영화를 ‘막걸리 스릴러’라고 소개한다. 단방에 취하게 만드는 자극적인 독주가 아니라 스멀스멀 순하게 먹다가 어느 순간 취한다는 의미다. 정진영은 “어떤 기대를 하고 봤든 ‘예상치 못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 것”이라며 “여행에 비유하자면 유명 관광지가 아닌 낯선 외국의 한 마을에 갔다고 생각하고 보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태영 기자
[ 관련기사 ]
◆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