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를 향한 분노… 눈물…
튼튼한 리얼리즘의 정신에다 낭만적 감성을 거느린 소설가 현기영(68·사진)씨가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이어 10년 만에 장편소설 ‘누란’(창비)을 펴냈다. 그가 오랜 공백 끝에 펴낸 새 장편에는 작금의 세상에 대한 통렬한 질타와 분노와 눈물이 가득하다. 1980년대 6월 거리의 군중은 사라져 버렸고 소비향락 문화의 해일 속에서 허우적대는 이들만 차고 넘친다. 쟁취했다고 믿었던 민주화는 허울 좋은 껍데기였을 뿐이고, ‘어리석고 교활한 민중’은 부활하고 있는 ‘세련된 파시즘’과 그 ‘교주’를 향해 내몰리고 있다고 절망한다. 어떻게 그러한가.

“이 천박한 세상에 젊음만이 유일한 가치이고, 유일한 이데올로기이지. 환갑 넘긴 노인들까지 젊어 보이려고 성형수술하는 세상이니까. 그렇지만 너희는 결코 젊지 않아. 너희가 젊다고? 어림없지! 너희는 저 십대로부터 벌써 늙은이 소릴 듣고 있잖아…. 아아, 정신연령이 십대 수준인 사회,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66·67쪽)
취직이 안 되는 철학이니 사학 따위는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만으로도 80년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 정도는 허무성의 절망 목록 하위에 불과하다. 패배한 싸움을 이긴 줄 알고 만세를 불렀지만 만세를 부르려고 쳐든 두 팔은 도로 내릴 필요도 없이 그대로 항복의 두 팔이 되고 말았으며, 그들이 바꾸려 한 시대가 도리어 그들을 바꿔 버렸고 변신을 꾀하려는 자들이 속출했다. 허무성에게 ‘민주화의 본색’은 “밤의 속성을 지닌 야차를 백주에 활보하도록 양성화한 것”에 불과했다. 김일강은 국회의원이 되어 허무성이 마지막 영혼까지 팔 것을 요구하며 술집에서 소리 지른다.

허무성은 월드컵에 홀려 광분하는 빨간색 군중 틈에 섞여 있다가 쓸쓸하게 노숙자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모든 관계를 끊고 과감하게 추락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 구조조정을 당할 게 아니라 스스로 그 구조, 그 체제에서 탈퇴하는” 행위였고, “지상은 소유하기 위해 혈안이지만, 이곳은 무소유… 사람들이 바삐 오고가는 역전광장, 지하도, 그리고 공원 같은 곳에서 굼벵이떼처럼 느리게 꿈틀거리는” 절망의 마지막 거처였다.
현기영씨는 “절망의 근거가 정당하지 않고 너무 과장된 것일지는 모르나 비관주의자인 나의 눈에 지금은 백약이 무효한 상황처럼 보인다”며 “패배를 사랑하고 절망을 은밀히 즐기는 마조히스트라고 매도할지 몰라도 희망을 말하면서 낙관론을 펼치려면 나 같은 비관주의자의 목소리도 경청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그는 나아가 “철저하게 절망하여 그 밑바닥에 닿으면 거기에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고, 그때 우리는 바닥을 걷어차고 힘차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라고 작가의 말에 애써 희망을 피력했다.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