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겉으로 드러나는 주인공은 17세의 수학 천재 겐지이지만, 사실은 27명의 가족 모두가 진정한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국내에서도 많은 지지를 받았던 호소다 마모루(42) 감독이 신작 ‘썸머워즈’를 들고 한국을 찾았다. 그는 3일 용산CGV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와 4일 서울 시내의 한 호텔에서 한 인터뷰를 통해 “전작이 여고생의 바이탈리티(생명력, 활기)를 그린 영화라면, ‘썸머 워즈’는 시골 가족들의 활기를 다룬 작품”이라고 말했다.
1999년 ‘디지몬 어드벤처’로 감독 데뷔한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뒤를 이을 만한 재목으로 손꼽힌다. 특히 독특한 상상력으로 그려낸 여고생의 성장담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그는 일본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최우수작품상 등 전세계 영화제에서 23차례 크고 작은 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2007년 한국에서도 소개돼 단 5개관에서 6만 관객을 불러모으기도 했다.
신작 ‘썸머 워즈’는 사이버 가상 공간과 가족을 다룬 이야기. 누구나 쉽게 접속할 수 있는 공간이면서 교통·소방·군사 등 각국의 주요 행정기능이 긴밀하게 얽혀있는 네트워크인 OZ가 정체불명의 침입자로 인해 혼란에 빠지자 17세 소년이 27명의 대가족과 함께 맞선다는 내용이다.
그는 “사이버 세계나 가족에 대해 최근 부정적인 보도가 많다. 영화 속에서는 두 가지 모두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가상세계나 디지털의 도움을 우리는 많이 받으면서 살고 있다. 또 세계는 굉장히 커다랗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작은 가족이 하나 하나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세계적인 문제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가족 속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영화에 나오는 가족 캐릭터에는 감독의 주변인물들이 반영돼 있다고도 했다. 그는 “영화 속 사카에 할머니의 모델은 실제 내 할머니”라면서 “엄하면서도 따뜻한 모습을 반영했다. 영화가 완성되면 꼭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6월달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보여드릴 수 없었다”고 말하며 안타까워 했다.
한국 팬들에겐 “전작에 대한 한국 팬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이 영화를 일본 개봉(8월1일)과 거의 동시에 한국에 선 보일 수 있게 됐다”며 “한국의 관객 여러분께 대단히 감사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 영화 중에선 진실한 인간성을 잘 표현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그는 “손으로 그린 애니메이션 만이 전달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면서 “인간이 가진 생명력과 긍정적인 힘을 계속 그려낼 것”이라고 말했다.
스위스에서 열리는 제6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공식경쟁부문에 초청된 이 영화는 13일 국내 개봉한다. 다음은 마모루 감독과의 일문일답.
- 한국은 몇 번째 방문인가.
“이번이 부산영화제와 2007 SICAF(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이어 3번째다. 전세계적인 경제불황으로 한국도 타격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직접 와 보니 굉장히 활기가 넘친다는 인상을 받았다. 불황에 그렇게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전작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그랬지만 상상력이 풍부하다. 스토리를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
“2006년8월에 시작해서 지난해 3월에 스토리를 완성했다. 나와 각본가, 프로듀서 2명이 스토리 작업에 참였다. 기획하는 데만 1년이 걸렸고, 시나리오를 쓰는 데 반년이 걸렸다.”
- 사이버 네트워크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싶었던 건가.
“최근 가족이나 인터넷, 가상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가 많이 나오고 있고, 실제 문제도 많다. 그러나 영화 속에선 두 가지 모두를 긍정적으로 그리고 싶었다. 우리는 가상세계나 디지털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고 있고, 거기서 힘을 받는 경우도 많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다. 또 실제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한 가족 속에 그 씨앗이 있다고 여겼다. 하나 하나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문제, 우리 가족의 문제로 귀결된다. 가족 속에서 문제를 해결했을 때 전 세계 속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이버 공간, 아바타와 시골의 아날로그적인 공간, 가족이라는 언발란스한 이미지들이 교차한다.
“이미지가 극단적으로 대비되지만 현대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모두 중요한 것들이다. 어느 한쪽만을 긍정한다든가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위협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중요한, 어느 한쪽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OZ를 그려낸 부분은 영화의 3분의 1쯤 되는 분량인데, 일본의 디지털프론티어라는 유명 CG회사의 힘을 빌렸다. 그 밖에 싸우는 인간들은 손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CG와 그림을 일치시키기 위해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 영화 속 대가족은 일본의 전형적인 가족상을 그려낸 건가.
“싸우러 나가기 전 함께 밥을 먹는 건 일본의 전통적인 관습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 도시의 가족은 혼자서 밥을 먹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부러 그렇게 그려낸 측면이 있다. 그것이 현대 일본 사회의 가족에게 필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지금 부모와 함께 밥을 먹는 게 드물 정도로 나쁜 사회가 됐다. 밥을 따로 먹는 것 자체가 현대사회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 27명의 가족 각각에 고유한 역할을 부여했는데, 전면에 내세운 건 소년과 소녀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썸머 워즈’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중요한 주인공은 17세 소년 겐지다. 그러나 진정한 주인공은 가족 전원이다. 모두가 자기만의 힘을 갖고 있고, 작은 역할이라도 하고 있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모든 가족의 응원 속에서 소년, 소녀가 앞으로 나가서 싸우는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 인물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도 자기가 가진 힘을 조금씩 내면 큰 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 제목이 ‘썸머 워즈’인데, 여름이라는 계절을 배경으로 한 이유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계절이다. 여름은 무언가 껍질을 벗고 성장하는 느낌이 있는데, 소년이 여름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 여름의 풍경을 담아내고자 했다.”
-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여고생의 성장담이라고 한다면, ‘썸머 워즈’에선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나.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표현한 것들이 있다. 전작이 여고생의 바이털리티를 다뤘다면, 이번엔 시골 가족들의 바이털리티를 다뤘다. 인간이 긍정적으로 살아가면서 생기는 생동하는 힘, 그리고 그 강력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썸머 워즈’는 그 속에서 성장하는 이야기이자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는 이야기다.”
- 영화 속 캐릭터에 개인사적인 부분이 반영된 게 있나.
“극중 사카이 할머니는 절반쯤 실제 나의 할머니의 모습을 반영했다. 엄하면서도 따뜻한 모습을 담아냈다. 그런데 얼마 전(6월)에 돌아가셨다. 영화를 꼭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시기가 맞지 않아 보여드릴 수 없었다.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한다. 와비스키는 나 자신의 좋지 않은 면, 불효자로서의 모습을 담았고, 쇼타는 처남을 생각하면서 그렸다. 주위 사람들은 나츠키를 보고 ‘당신 아내를 그린 거 아니냐’고 하던데, 그런 면이 약간 있다. 사실은 고교 시절 좋아했던 선배의 이미지가 투영돼 있다,”
- 한국에선 3D 애니메이션이 앞으로 대세가 될 거라고들 한다.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나.
“지금은 미국 디즈니사에서도 수작업 애니를 하지 않는다. 완전히 3D로 변해버린 상황인데, 개인적으로 손으로 그린 애니 만이 전달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2D 애니메이션이 사라질 거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미술사를 보더라도 손으로 그린 그림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 애니메이션 만이 가진 장점이 있다면.
“캐릭터를 심플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캐릭터 속 마음이나 감정을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다. 실제 인물은 대단히 복잡한 데 비해,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그 모든 복잡 미묘한 감정을 스트레이트하게 표현할 수 있다.”
- 차기작은.
“이 영화가 일본과 한국에서 성공해서 제작비가 회수되면 작업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웃음). 새 영화를 만들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인공 숫자는 2∼3명 정도로 줄여야 할 것이다. 좀더 상식적인 숫자의 주인공이 나오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웃음). ‘썸머 워즈’는 이야기 자체는 간단하지만 수많은 요소를 다뤘기 때문에 다음 작품은 좀더 심플한 느낌으로 만들고 싶다. 인간의 바이털리티, 그가 가진 긍정적인 힘이 지금까지 공통의 테마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바보스럽지만 밝고 행동력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 한국 영화 중에 인상적인 작품이 있다면.
“봉준호 감독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살인의 추억’은 대단했다. ‘괴물’ 도쿄 시사회에선 직접 만나 인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영화 자체도 좋았지만 만나서 영광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우리 가까운 데 있는 걸 그려내고, 영화 속 인물들이 매우 진실한 인물들이다. 전세계인 누구라도 공감할 만한 공통적인 가치관과 미의식을 아주 훌륭하게 표현해내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에서뿐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살인의 추억’을 봤을 땐 영화나 실제사건에 대한 정보를 모르고 봤는데, 라스트신을 보고 너무너무 놀랐다. 한국사람들은 범인이 없다는 걸 알고 봤나. 그렇게 그 사람을 쫓고 쫓았는데 결국은 범인이 아니었다니, 지금 생각해도 오싹해져 올 정도로 훌륭했다. 신작 ‘마더’은 일본에서 아직 개봉을 안 해 못 봤는데,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
- 한국 팬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일본에서 8월1일 개봉하자마자 한국에서 13일 선을 보일 수 있게 됐다. 모두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대한 한국 팬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대단히 감사한다. 한국은 일본보다 인터넷도 발달해 있고, 화투도 일반화돼 있다. 어떤 의미에선 한국 팬들이 더욱 공감하고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막판에 일어나는 기적을 극장에서 확인하고 느끼면서 재미있게 봐 줬으면 좋겠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세계일보 온라인뉴스부 bodo@segye.com, 팀블로그 http://ne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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