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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팜므파탈'은 누구?

입력 : 2009-08-04 18:23:07 수정 : 2009-08-04 18: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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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마도의 향불’여주인공 정숙경 한국 최초의 팜므파탈은 누구일까. 통칭되는 ‘악녀’ 혹은 ‘요부’로만 본다면 요즘 소설, TV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신라의 미실을 비롯해 ‘장화홍련전’의 계모 허씨, ‘사씨남정기’의 첩 교씨 등이 팜므파탈에 해당된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따지자면 한국의 첫 팜므파탈은 관계를 맺은 남성을 살해한 19세기 이후 여성 캐릭터로 한정돼야 한다. 팜므파탈이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계열 소설에서 ‘사랑에 빠진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치명적 매력을 지닌 여인’이란 뜻으로 처음 등장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MBC 월화 드라마 ‘선덕여왕’의 한 장면. 드라마 속 미실은 한국의 대표적인 팜므파탈로 일컬어진다.

현대소설을 전공한 최애순 박사(고려대 강사)는 1932년 11월부터 1933년 6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된 방인근의 소설 ‘마도의 향불’의 여주인공 정숙경을 한국 최초의 팜므파탈로 친다. 최 박사는 최근 발간된 ‘정신문화연구’ 여름호에 게재된 논문 ‘식민지 조선의 여성범죄와 한국 팜므파탈의 탄생’에서 소설 속 숙경은 ▲전처 소생의 딸 애인까지 유혹한 농염한 요부이고 ▲딸을 집에서 쫓아낸 뒤엔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남편까지 살해한 잔혹한 독부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한국형 팜므파탈의 시초라고 주장했다.

‘음녀’ ‘살인’ ‘후처’라는 이미지로 한국형 팜므파탈 전형이 마련된 것은 당대 상황과 무관치 않다. 1920∼30년대는 일부일처제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첩을 둔 남편은 본처로부터 간통죄로 고소·이혼 당할 수 있었고, 본처가 학대와 폭력을 일삼는 남편을 살해하는 ‘본부(本夫)살인사건’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식민지 조선의 남편들은 ‘사씨남정기’의 사씨처럼 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착한’ 본처가 없을뿐더러 아내에게 잔혹한 폭력을 행사할 경우 목숨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남편들은 자신의 ‘부적절한’ 처신의 이유가 악독한 첩(후처)의 간교한 꼬임에 있었다고 강변하는 대중소설을 필요로 한 것이다. 아내들에게도 ‘일부일처’는 이전에는 겪지 못한 새로운 변화이자 위협이었다. 신여성, 여학생, 첩, 기생 등으로부터 남편은 물론 본처 자리를 빼앗길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 도래했다. 이들이 가진 유일한 카드는 (남편 이전에 다른 남성과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정조’였고 이를 적극 홍보하는 대중소설의 출현을 고대했다. 잔혹한 살인의 역할은 애초부터 음탕하고 요망한 계집인 후처, 첩의 몫으로 돌려져야 했던 것이다.

최 박사는 “한국의 팜므파탈 이미지는 식민지 조선을 들끓게 했던 본부살해사건과 여성의 ‘정조’ 관념을 이용해 봉건적 가정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미묘한 의도들, 대중소설에 공고화된 권선징악의 구도가 복잡하게 결합돼 탄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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