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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베르트랑 지음/이정주 옮김/국민서관/8000원 |
이유는 서로 상대가 자신들을 업신여긴다는 거였다. 싸움은 하루 이틀을 넘어 일주일,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됐다.
어떤 날은 길에 긴 채소들이 댕강댕강 썰려 있고, 어떤 날은 둥근 채소들의 껍질이 쑥쑥 벗겨져 땅을 뒤덮고 있었다.
마음씨 착한 토끼 막심은 더 이상 부상한 채소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어머니가 운영하는 채소가게 한편에 야전병원을 차린다. 평화주의자인 길쭉한 호박이 열심히 도왔다.
게으른 개가 맡고 있는 시장과 부시장은 속수무책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50일이 되었다. 전쟁은 도시의 일상이 되었고, 시민들은 채소 전쟁에 익숙해졌다. 신문들도 채소 전쟁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채소학자들이 전국채소학자회의를 열어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 위한 토론에 들어갔다. 학자들은 각자 이론을 제시했다. 식물이 갖고 있는 특성을 열심히 얘기하며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무 학자는 “무는 휴전을 원하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 호박 학자가 “무는 천성적으로 평화를 좋아하나 큰 힘이 없으니 호박이 나서야 한다”고 뒤집었다. 이에 질세라 파 학자는 “우두머리는 파이니, 파의 동의 없이 전쟁은 끝날 수 없다”고 단정했다.

전쟁 발발 51일째 되던 날 마침내 힘 있는 농림부 장관인 오소리가 나섰다. 호텔에 숙소를 정한 오소리 장관은 둥근 채소 대표와 긴 채소 대표를 불러서 휴전을 명령했다. 장관의 엄명에 양측 대표들은 시를 반으로 나눈 뒤 한쪽은 긴 채소가, 다른 한쪽은 둥근 채소가 차지해 살기로 합의했다.
휴전선은 버섯평화유지군이 지키기로 했다. 버섯은 몸이 길쭉하고 얼굴을 동그랗기 때문에 중립을 지킬 수가 있었다. 전쟁을 평화롭게 해결한 오소리 장관은 그 후 능력을 인정받아 총리후보에까지 오른다.
평화는 금세 찾아왔다. 시민들은 이제 맘 놓고 길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길 곳곳에 설치했던 무시무시한 채소 방어벽도 사라졌다.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전쟁을 취재하던 종군기자들도 도시를 떠났고, 휴전선을 지키는 버섯평화유지군만 조용히 움직였다.
그때 막심의 귀에 엄마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밥상에서 무슨 생각에 빠진 거니? 얼른 채소 수프 먹고 자야지!” 현실에선 막심이 먹기 싫은 채소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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