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이족’(東夷族)에 대한 사전적 정의다. 이런 정의에 따라 우리 민족은 자연스럽게 동이족의 후예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 반기를 든 학자가 있다. 중앙대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유학,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에서 언어인류학을 전공해 한장어(漢藏語)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마쉐량 교수의 지도 아래 ‘한국과 묘족의 창세신화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인희(41·사진)씨는 ‘소호씨 이야기-산둥 다원커우 동이족의 탐색과 발견’(물레)에서 우리가 덜컥 선조로 믿고 있는 동이족과 중국 다원커우의 동이족은 근본적으로 다른 민족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기원전 4100년에서 기원전 2600년까지 살았던 다원커우 동이족 문화가 꽃핀 산둥지역은 물론이고 그 주변의 양쯔강 중하류, 황허강 중하류, 랴오닝성 일대의 고고학 자료들을 수집하여 비교연구한 김씨는 동이족은 역사상 두 개가 존재했음을 밝혀낸다. 하나는 진(秦) 이전 춘추전국시대인 선진시대 때의 금문에 새겨진 동이족이고, 다른 하나는 ‘후한서’에 기록된 동이족으로 공자가 가서 살고 싶다고 했던 그 동이족이다.
으레 ‘동이족=한민족의 선조’라 믿어왔던 김씨도 10여년 다리품을 팔아가며 ‘동이족→고대 한민족’이란 가설을 입증하려고 무던히 애를 써왔으나 무위에 그쳤다. 그는 고대 문헌을 공부하고, 고고학 유물들을 조사하고, 때론 참여관찰자로서 중국 서남부의 소수민족 먀오족과 야오족을 사귀며 그들 사이에 남아 있는 부족사회의 전통을 통해 원시시대의 사회상을 유추하는 사이, 한국학계의 일반적인 가설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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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커우를 다스린 최고의 신 소호. 신권을 상징하는 도끼 월을 손에 들고 팔에는 옥팔찌와 옥비환을 두르고, 귀에는 신의 소리를 잘 듣게 해준다는 귀고리를 찼다. 소호를 닮고자 했던 동이족들은 솟대를 세워 새의 신 소호를 기렸다. |
3장은 생존을 위한 투쟁의 과정을 담은 것으로 그들의 정신문화적 특징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머리를 납작하게 하고(편두) 이빨을 강제로 뽑고(발치) 구슬을 입에 물어 잇몸을 갈고(구함구) 했던 것이 모두 새의 신 소호를 닮기 위한 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신석기 동이족 문화의 우수성을 다룬 4장에선 이때부터 농사가 시작되고 오늘날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를 만한 문물들이 창조되기 시작했음을 설명한다.
마지막 5장에선, 그토록 뛰어난 문명을 이룬 동이족이 어떻게 반문명의 상태에 빠져 멸망에 이르게 됐는지 충격적인 내용을 전한다. 원시사회에서 추장사회로 진입하고 거기서 국가의 초기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파멸의 씨앗들은 물질문명을 고도로 발전시켜놓고도 행복하지 않은, 끊임없는 전쟁과 기아와 자연파괴 같은 위기에 빠진 오늘날을 성찰케 한다.
이에 대해 이형구 선문대 명예교수는 “한서 이후 동이족은 한반도와 요동반도에 살던 무리가 확실하다”면서 “중국을 다룰 땐 포괄적으로 다뤄야지 협소한 관점에서 보면 전체를 놓치기 쉽다”고 말했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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