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더 독하게’ 하라고 주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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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낮 서울 여의도 KBS 개그콘서트 연습실에서 김경아, 강유미, 안영미, 정경미(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가 코믹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제원 기자 |
“헉! 누구냐 넌! 경아니? 분장이 점점 더 독해진다∼.”
온몸을 초록색으로 덧칠한 김경아가 분장실 앞을 나서자 지나가던 선배 변기수가 화들짝 놀란다. 개그콘서트 녹화를 앞두고 ‘분장실 강선생님’ 팀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분장실에는 화장품 향기가 아닌 본드와 아세톤 냄새가 진동했다. 한쪽에서는 ‘왕비호’ 윤형빈이 시꺼먼스 분장을 한 이를 한없이 사랑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정경미였다.
‘골룸’ 안영미와 오리 분장을 한 강유미는 소파에 앉아 ‘선배님∼저 좀 키워주세요∼’라는 대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각자 분장과 연습이 바쁜 탓인지 ‘군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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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공룡 둘리’의 캐릭터로 분장한 주인공들. 왼쪽부터 ‘골룸’ 안영미 ‘또치’ 강유미 ‘마이콜’ 정경미 ‘둘리’ 김경아 |
사전진행자가 “다음은 ‘분장실 강선생님’ 순서입니다”라고 외치자 객석은 들썩였다. 여기저기서 ‘똑바로해 이거뜨라(이것들아)∼’를 복창하며 깔깔거렸다. 곧이어 검은 천에 둘러싸인 채 출연자들이 종종걸음으로 등장했다. 검은 천을 걷어내자 ‘둘리’ 분장을 한 김경아와 ‘마이콜’로 변신한 정경미의 뒷모습만 보고도 객석에서는 ‘어우 어떡해∼’, ‘와!’ 하는 탄식과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이어 안영미와 강유미가 나오자 분위기는 점점 고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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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콜’로 분장한 정경미. |
전날 밤늦게 녹화가 끝났지만 다음주 콘티를 짜기 위해 ‘분장실 강선생님’ 팀이 다시 모였다. 화장 안 한 맨 얼굴의 풋풋한 그녀들이 과연 어제의 그 골룸과 마이콜, 둘리, 배불뚝이 오리였는지 눈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연습실에서는 선후배 위계질서가 나타나겠지’라고 생각하는 찰나 안영미가 후배 정경미에게 ‘언니∼’라고 부른다. 안영미(26·이하 ‘안’)와 강유미(26·이하 ‘강’)는 KBS 개그맨 공채 19기, 정경미(29·이하 ‘정’)는 공채 20기, 김경아(28·이하 ‘김’)는 공채 21기다. 극 설정처럼 나이 어린 선배와 나이 많은 후배 관계다.
이들은 최근 점점 독해지는 ‘막장 분장’과 선후배 간 위계질서 속에 드러나는 아부와 질투를 제대로 비튼 개그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본드와 아세톤 냄새를 뒤집어쓰고도 무대에서 환호받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4명의 개그우먼. ‘분장실 강선생님’ 팀이 말하는 분장실 분위기와 이상적인 선배상에 대해 들어봤다.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데 성공 요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안=막상 인기를 실감하지 못하겠다. 전철을 타고 다니는데 아무도 못 알아본다.
▲정=아는 척하면 ‘뭘 쳐다봐 이거뜨라∼’라고 할까봐 무서워 그런거 아닐까. 호호호.
▲강=상하 위계질서가 개그계 혹은 여자들만의 문화가 아니라 어느 조직에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좋아하는 것 같다. 후배에게 군림하고 상사에 아부하는 캐릭터는 어디에나 있지 않나.
―처음 아이디어를 낸 건 정경미씨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정=분장실에서 박성호 선배가 ‘스테파니’ 분장을 한 채 담배 피우면서 진지하게 얘기하고, 바보 분장을 한 선배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고 웃겨서 착안했다.
▲안=치아 교정기를 낀 탓에 발음이 새 고민이 많았는데 오히려 ‘똑바로해 이거뜨라∼’가 유행어가 됐다. 대학 때 여자 선배들이 이런 말투였다. 특히 학교 다닐 때 잘 못했던 선배들이 ‘야 우리 땐 기어다녔어’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거기서 모티브를 얻었다.
―실제 개그맨들은 군기가 세다는 얘기도 있던데 어떤가.
▲김=처음에는 선배님들이 어려웠는데 3, 4년 지나니 너무 편하고 좋다. 그래서 선배를 구박할 때도 종종 있다.
▲안=(하이톤으로) 우리 땐 상상도 못할 일이었어.
▲강=막내 때는 차 끓여오고 잔심부름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이 많은 후배와 나이 어린 선배가 서로 ‘선배님’ ‘언니’ 하며 존중해준다. 어느 정도의 위계질서는 필요한 것 같다.
―독한 분장에 대해 남자친구나 가족들의 반응은.
▲정=남자친구가 더 좋아한다. ‘더 칠해야 돼. 털도 더 붙여. 쟤들보다 더 웃겨보여야 돼’라고 격려해준다.
▲안=첫 회 때는 어머니가 ‘왜 그러고 나오냐. 어떻게 시집가려고 하냐’며 걱정하셨다. 그러다 반응이 좋아지니 ‘저 언니들보다 더 망가져야 돼, 이번주에는 네가 좀 약하더라’며 부추기신다.
▲정=대머리 가발을 석유로 떼내기 때문에 집에 가도 석유 냄새가 진동한다. 어머니가 ‘우리 경미가 석유 냄새 뒤집어써가며 돈을 버는데…’ 하며 안타까워하시기도 하지만 난 정말 재밌다.
―한창 예뻐보이고 싶을 나이인데 막장 분장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
▲정=녹화하는 수요일이 되면 ‘오늘은 어떤 분장에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하는 기대감에 부푼다.
▲김=분장실 강선생을 하면서 오히려 여자라서 심한 분장을 못한다거나, 한계가 있다는 선입견이 사라졌다.
▲강=분장 지울 때 얼굴이 화끈거리고 본드가 잘 안 떨어져서 머리카락이 같이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분장을 할 수 있는 것도 복이라고 생각한다.
▲안=이참에 폼클렌징이나 제모 광고를 찍어도 좋을 것 같다. 내가 ‘털이 말을 안 들어요 선배님∼’ 하면 유미가 ‘니가 털 때문에 고생이 많다. 이걸로 떼봐라’ 하는 거다.
―롤모델로 삼거나 존경하는 선배가 있을 것 같다.
▲강=열정과 용기로 일본에 진출한 조혜련 선배도 존경한다. 특히 후배인 신봉선 언니가 메인 MC를 하는데 한참 선배이면서도 세컨드 MC를 하시는 모습을 보며 마음을 비우고 후배를 뒷받침해주는 진정한 선배라고 생각했다.
▲안=드라마, 버라이어티, 시트콤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면서도 어디에서든 튀지 않고 부드럽게 조화되는 박미선 선배처럼 되고 싶다.
▲정=박식하고 언변이 뛰어난 정선희 선배를 존경한다. 복귀 소식 듣고 정말 기뻤다. 정 선배처럼 훗날 라디오 DJ를 해보는 게 꿈이다.
▲김=김미화 선배가 심사위원 하실 때 개그를 한 적이 있다. 리허설 때부터 후배들 연기를 봐주고 지적해주시는 모습을 보고 나도 개그를 사랑하고 후배를 아끼는 선배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개그우먼이 안 됐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강=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만화가가 꿈이었는데 그림이 안 돼 포기했다. 개그맨 하다가 만화가 데뷔해서 히트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SF, 특히 복제인간에 관한 만화를 하고 싶어 캐릭터까지 다 짜놨다.
▲안=무대 위에 서고,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걸 좋아해서 개그맨 안 됐다면 지금쯤 대학로에서 연기하고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연극도 하고 싶다.
▲정=좀 엉뚱하지만 양궁선수가 되고 싶다. 집중해서 뭔가를 맞히는 걸 잘하는 편이어서 활 쏘기로 인형도 많이 받았다.
▲김=작가를 해보고 싶다. 서른이 넘으면 시트콤 작가에 도전해볼 생각이다.
김수미 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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