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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거 100주년](중) ‘순국의 현장’ 뤼순을 가다

관련이슈 안중근 '하얼빈 의거' 100주년

입력 : 2009-01-30 21:24:47 수정 : 2009-01-30 21: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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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법원 오가며 침략 부당성 알린‘증언의 터’
◇뤼순 감옥 공동묘지에서 발굴된 사형수들의 유해.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이들처럼 나무통에 구겨진 채 넣어져 있을 것으로 보인다(큰 사진). 사형선고 직후의 안중근 의사 모습(왼쪽 사진)과 뤼순 감옥 내부.
뤼순=김청중 특파원
“이 일은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역사적인 의거를 결행하고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11월1일 하얼빈을 떠나 11월3일 뤼순(旅順)으로 압송된다. 뤼순은 1905년 러·일전쟁 후 일본이 조차한 곳으로 사실상 일본 영토와 다름없었다. 일본은 이곳에서 자국의 의지대로 안 의사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고자 했다.

뤼순 감옥에 수감된 안 의사는 이듬해인 1910년 3월26일 순국할 때까지 관동도독부 법원을 오가며 세계를 향해 대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자신의 동양평화 사상을 웅변한다.

순국의 현장인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으로 향했다.

중국 본토와 만주(둥베이·東北) 지역을 연결하는 발해만의 전략적 요충지인 뤼순은 원래 독립된 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롄이 급성장하면서 다롄의 6개 구·2개 시 중 한 구로 쇠락했다. 정식 명칭은 뤼순커우(旅順口)구. 지금도 군사기지가 밀집한 비개방 지역으로 외국인의 출입이 제한돼 있다.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이르면 오는 6월쯤 대외개방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먼저 일본 관동법원 구지(舊址)를 찾았다. 황허(黃河)로에 위치한 2층짜리 관동법원 건물은 일제 통치기관 특유의 권위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100년 전 안 의사가 재판을 받던 당시의 모습을 대체로 간직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906년 랴오닝성 남부에 관동주(關東州)를 만들고 통치기구로 뤼순에 관동도독부를 설치했다. 도독부 산하엔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을 뒀다. 원래 전체 면적 5300㎡ 규모였던 법원은 현재 1300㎡만 남은 상태다. 법원 건물은 1945년 해방 후 잠시 다롄시에서 이용하다가 1953년부터 병원으로 운영됐다.

1999년 뤼순커우 인민병원은 이 건물을 헐고 신축건물을 지을 계획을 세워 철거 위기에 몰렸다. 다행히 한국의 여순순국선열재단이 다롄시 정부에 건물의 중요성을 강조해 문화재 지정을 받은 뒤 병원 측과 협상을 거쳐 건물을 매입, 원형복원 후 전시관으로 만들었다. 11개의 전시장에는 일본 법원 설립 배경, 지방·고등법원 원장실과 각종 사진, 안 의사 유묵, 도표 등이 전시돼 있다.

특히 1910년 2월 안 의사에 대한 6차례의 공판이 열렸던 2층 고등법원 법정에 다다르니 죽어서 영원히 살게 된 안 의사의 애국혼이 숨 쉬는 듯하다.

고등법원 법정에서 열린 공판은 안 의사에 대한 재판이라기보다는 일본에 대한 안 의사의 재판이었다. 안 의사는 검찰관과의 치밀한 논리 싸움을 통해 대한독립의 정당성과 일본의 조선침략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렸다.

안 의사는 법정에서 이렇게 당당히 주장했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국 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한 것이니 만국 공법(국제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

안 의사의 재판을 지켜본 영국 ‘그래픽’지의 기자 찰스 머리모는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으며,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입을 통해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고 평했다.

안 의사는 1910년 2월12일 이곳에서 열린 최후 진술에서 재판장과 검찰관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을 즐기려고 하지 죽기를 원하겠는가? 그러나 한국민은 사시장철 도탄에 허덕여 고생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아마도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마음은 일본 사람보다 더 한층 강하리라 생각한다.”

2월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안 의사는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며 죽음 앞에서도 시종일관 초연한 자세였다. 안 의사는 항소를 포기한다. 안 의사를 극형에 처하려는 일본의 기세로 인해 판결이 번복될 가능성이 작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안 의사가 동양평화론 집필을 마칠 때까지 사형집행을 유보하겠다는 재판장의 권유도 있었다.

안 의사는 사형선고 후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 집필에 몰두한다. 안 의사가 최후를 맞이한 샹양제(向陽街) 139호 뤼순감옥 터로 향했다.

현재 명칭은 ‘뤼순일·러(日俄)감옥구지’다. 러시아가 통치하던 시기에 진행되던 감옥 공사는 러·일전쟁이 터지면서 중단됐고 이어 뤼순을 차지한 일본이 완성했다.

감옥 정문 앞에 서니 온몸이 포박된 채 재판을 받기 위해 감옥 문을 나서던 안 의사의 의연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경비초소를 지나 감옥 안으로 들어가니 4m 높이의 끝모를 붉은 담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벽의 길이는 725m쯤 된다. 사방이 높은 담과 창살로 둘러싸인 이곳을 지날 때 푸른 하늘을 보며 안 의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독립운동에 헌신한 겨레의 큰 별 이회영, 신채호 선생도 이곳에서 옥사했으니 뤼순감옥은 민족혼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감옥에서 안 의사는 다른 죄수에 비해 좋은 대우를 받았다. 안 의사는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서 “매일 목욕도 시켜주고 서양과자와 차도 넉넉히 줘 배불리 먹게 하고 밀감 배 사과 등 과일도 매일 두서너 차례씩 넣어주었다”고 적고 있다. 국사범에게 찾아보기 힘든 파격적인 대우였다. 하지만 본국 정부에서 안 의사를 극형에 처할 것을 결정한 뒤 관대했던 검찰관의 태도도 돌변했다고 한다.

안 의사는 이곳에서 자서전을 탈고했고, 자신의 사상을 펼칠 동양평화론 집필에 들어갔지만 미완으로 남는다. 안 의사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는 대다수 유묵도 이곳에서 쓴 것이다.

세탁장 자리에 다다르자 안내를 하던 박용근 다롄 안중근연구회 회장(재중동포)이 걸음을 멈춘다.

박 회장은 “여기가 교수형이 집행된 장소다. 각종 문서와 도면을 추적해 세탁장 자리가 안 의사 수형시절 사형집행장임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안 의사는 이곳에서 짧지만 굵은 31년간의 생을 마쳤다.

안 의사는 사형집행 전인 3월10일 동생 정근, 공근, 빌헬름 신부를 면회한 자리에서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남긴다.

“내가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을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노니 우리들 2000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實業)을 진흥하며 나의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1910년 3월26일 안 의사는 어머니가 보낸 한복으로 갈아입고 이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뤼순감옥은 당시 사형집행수의 유해를 발굴해 전시하고 있다. 50∼60cm의 나무통에 구겨 넣어진 시체는 소름을 돋게 한다. 안 의사 유해도 이런 행태로 매장됐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당국은 유해를 돌려 달라는 유족의 간절한 소망에도 비밀리에 안 의사의 시신을 유기했다.

지난해 안 의사 유해가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감옥 뒤편 야산 일대에서 발굴작업을 벌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박귀언 여순순국선열재단 상임이사는 “유해를 어디에 유기했는지 당시 일본 관동도독부 당국의 처리 보고서를 확보하기 전에는 유해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순국 100년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안 의사의 혼령은 이국 땅을 맴돌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후손의 머리는 저절로 숙여진다.

안 의사의 최후 유언은 오늘에도 큰 울림으로 남는다.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뤼순=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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