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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85) ·끝 백제 위덕왕시대 日 불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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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1-28 13:00:37 수정 : 2009-01-28 13: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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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인 숨결 깃든 목탑·춤… ‘아스카 문화’ 꽃피우다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지었다는 아스카절 입구.
일본의 불교문화가 백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 아직까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일본에서의 백제 불교는 서기 552년 백제 제26대 성왕(聖王·523∼554 재위)의 왜왕실 포교가 최초였다. 이를 이어나간 것은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이름은 昌·554∼598 재위)이며, 위덕왕은 재위 기간 45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실제로 일본에서 백제 불교를 꽃피운 선두주자였다. 그 시대, 즉 일본이 자랑하는 ‘아스카문화’(飛鳥·592∼645) 시대에 일본의 왕은 왜나라 최초의 여왕인 스이코(推古·592∼628 재위) 여왕이었다. 스이코 여왕은 백제 성왕의 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백제 위덕왕과는 이복남매간이었다.

◇584년 백제가 왜왕실로 보냈다고 전해지는 백제 사리 용기.
스이코 여왕의 아스카문화 시대를 입증하는 백제 불교의 자취가 최근 국내에서 발견됐다. 바로 전북 익산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의 사리공에서 발굴된 금제사리호다. 또 “백제 귀족 좌평(佐平) 사탁적덕(沙琢積德)의 딸인 왕후가 기해년(서기 639년) 창건했다”는 미륵사의 창건자 등 내력이 적힌 금제 사리봉안기 기록 등을 비롯해 유물 500여점을 한꺼번에 발견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 문화사의 일대 경사다.

특히 백제 불교 금속공예의 빛나는 세공 기법을 보여주는 금제사리호는 2007년 충남 부여 왕흥사지(백마강 구드래 나루터 건너 산언덕 밑 터전) 목탑터에서 발견된 위덕왕 시대(서기 577년 제작) 금은동 3개의 빼어난 사리기 이후 두 번째로 발굴된 자랑스런 백제 사리기다. 지금까지 백제 예터전에서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최초의 사리 터전은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위덕왕 시대(567년)의 석제(石製) 사리감(사리를 안치하는 시설)이었다.

이 세 곳 모두 백제 불교문화가 왜의 아스카 불교문화 시대를 이룩했던 직접적인 배경을 입증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일본 역사에서도 백제에서 왕흥사를 짓고 왜땅 아스카로 건너간 백제 건축가들이 588년부터 596년까지 8년간에 걸쳐 일본 최초의 칠당가람 아스카절(飛鳥寺)을 세웠다(‘일본서기’)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본 불교 왕조사라 할 수 있는 ‘부상략기’(扶桑略記·13세기경)에서는 593년 1월, 당시 한창 건설 중이던 “아스카절 목탑 터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법요를 가졌으며, 만조백관이 백제옷(百濟服)을 입고 있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다”고 쓰고 있다.

◇2007년 충남 부여 왕흥사터에서 발굴된 황금사리병 등 유물 일괄.
그런데 일본 역사 기사로는 왜왕실 조정의 백제인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626) 대신이 584년 9월 “백제에서 보내준 미륵석상(彌勒石像)을 이시카와(石川)의 자택에 모시고 불전을 세웠으며, 이듬해 2월에는 오노노오카(大野丘) 언덕에 목탑을 세우고 그 기둥 밑에다 부처님사리 용기를 봉안했다”(‘일본서기’)고 한다. 이는 백제 미륵불교가 왜나라 초기 불교의 바탕이 되었음을 추찰케 한다. 또 오노노오카의 목탑에서 발굴되었다는 백제의 사리 용기 기사가 일본 역사 최초의 사리봉안 기록이기도 하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6세기 후반 왕흥사 목탑 건립이며, 아스카 시대 등 백제식 목탑과 사리기 봉안 등에서 보듯이 백제는 원래 석탑이 아닌 목탑을 세우다가 후대에 가서 돌로 축조하는 석탑을 세우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간에 목탑 건조에서 석탑 축조로 바뀌는 과정에서 639년의 익산 미륵사지석탑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뛰어난 석조 건축 양식이며, 예술적 미감 넘치는 훌륭한 석탑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최근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백제 무왕시대 금제사리호.
577년 왕흥사의 사리 용기며 서기 639년 무왕(武王·600∼641 재위) 당시의 미륵사 창건 석탑 봉안 사리호의 발자취와 더불어, 일본 아스카에서의 584년과 593년의 사리기 봉안 등은 모두 한결같이 백제와 일맥상통하는 아스카 스이코 여왕 당시의 백제 불교문화의 눈부신 발자취가 아닐 수 없다.

지난해 4월 초 부여 왕흥사 목탑 사리공 등 이 터전 발굴 현장을 답사했던 일본 와세다대학의 불교미술사학자 오하시 가즈아키(大橋一章·와세다대학 박물관장) 교수는 지난해 5월 22일 필자에게 직접 “왕흥사 터에서 발굴된 금은동제 사리기 3종은 훌륭한 불교문화의 발자취이다. 또 각종 출토물과 기와(연꽃무늬 수막새)의 문양과 탑 구조 등은 일본 나라 땅 아스카 절의 유물과 거의 일치한다. 일본에 건너와서 596년에 아스카 절을 건축한 백제 건축가들은 이미 그 이전에 백제 땅에서 왕흥사를 건축했던 똑같은 기술자들이었다. 나라(奈良) 땅의 아스카 절은 왕흥사를 모델로 건설한 일본의 유일한 1탑 3금당 형식 사찰이다”고 말했다. 오하시 교수는 이런 내용을 일본 아사히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에 건너간 백제 건축가들이 596년 완공한 아스카절 건설은 일본 불교사를 장식하는 왜왕실 최초의 경사였고, 이때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백제 문화가 일본 나라 땅에 꽃피기 시작하는 눈부신 발판이 되었다. 이 당시 건너간 백제 건축가와 기와박사, 화공 등 관계자들의 이름을 ‘일본서기’ 역사책에서 잠깐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당시 백제인들은 복부미신(福富味身)을 비롯해 태량미태(太良未太), 문가고자(文賈古子), 마나문노(痲奈文奴), 석마대미(昔痲帶彌) 등 대부분 두 개의 한자 글자로 된 이른바 복성(複姓)을 썼다. 당시 일본 선주민들은 성씨라는 것은 전혀 없는 미개 상태였다. 즉 성명은 왕과 귀족에게만 허락되었다. 그와 같은 사실은 일본의 근세(近世)까지도 이어져 왔다. 17세기 에도시대까지도 “일반 서민은 성명을 지을 수 없으며, 허리에 칼도 찰 수 없는 엄중한 ‘명자대도의 금령’(名字帶刀の禁令)이 내려져 있었다”(‘日本人の姓’ 1972)고 성씨 학자로 고명한 사쿠마 에이(佐久間英) 박사는 밝혔다.

일본에서 서민도 제 성을 법적으로 허용받게 된 것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게 된 1874년부터였다. 이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고대 백제 등의 복성인 한자 두 글자의 성을 짓느라 법석을 부렸다(앞 ‘日本人の姓’).

아스카 시대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603년 10월 “스이코 여왕의 왜왕실로 백제 스님 관륵(觀勒)이 달력과 천문지리 등 서적을 가지고 건너가서 가르쳐 주었다”(‘일본서기’)고 한다. 이에 따라 왕실과 귀족들은 비로소 달력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의 은인’ 백제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일본 도쿄천문대학의 천문학자 후루카와 기이치로(古川麒一郞) 교수는 그가 발견한 우주의 소행성에 관륵 승정의 이름을 따 ‘간로쿠’(觀勒)라고 명명해 국제천문연맹(IAU)에 등록했다(홍윤기 ‘일본문화사’ 서문당, 1999).

아스카 시대 일본의 사자춤, 가면무 등 음악 무용은 역시 백제인에 의해 창시됐다. “613년 백제의 음악무용가 미마지(味摩之·6∼7세기)가 스이코 여왕 왕실로 건너와 왕실에서 천거한 제자 둘(眞野首弟子와 新漢濟文)을 가르쳤다”(‘일본서기’). 물론 이들은 백제인 후손들이었다. 이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친 터전이 현재 오사카의 사천왕사(四天王寺) 경내에 남아 있는 ‘무대강’(舞臺講)이라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큰 돌춤터다. 이 모든 것은 백제 위덕왕 시대 백제문화의 포괄적인 전수였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백제문화와 아스카에 연관된 사항은 많지만 지면 관계로 여기서 줄이며 일단 졸문의 대미로서 마무리하련다.

한국외대 ‘일본사회와 문화’ 담당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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