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홍윤기의 역사기행] (83) 오우미 땅 백제인 터전 오토모 가문과 덴치왕

입력 : 2008-12-31 09:18:52 수정 : 2008-12-31 09:18:52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日 천태종의 개창자도 백제인의 후손이었다
◇쇼겐지 경내.
일본 교토시 동쪽 비와코 호수 지대인 오우미(近江) 지방에는 사카모토(坂本)라는 지역이 있다. 이곳은 고대 백제인 오토모(大友) 가문의 옛 터전으로 이름난 곳이다. 시가현 오쓰시의 오쓰역에서 사카모토행 전철을 타고 불과 10여분만 가면 사카모토역에 이른다. 교토산대 고대사연구소장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고문헌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며 “오우미 지방에서는 명문인 백제인 오토모 가문이 번성했다”(‘渡來人’ 1987)고 밝혔으며, 그 밖의 저명한 일본 고대사학자들도 백제인의 고장임을 각각 고증하고 있다. 물론 비와코 호수 일대는 사카모토 지역 외에도 가모군(蒲生郡)을 비롯해 구루모토군(栗太郡)과 야스군(野洲郡) 등 오우미 땅 일대에 백제인들이 드넓게 퍼졌던 것이 문헌마다 잘 드러나 있다.
◇쇼겐지 내 옛 우물터.

우선 우리의 이목을 끄는 것은 8세기 사카모토의 오토모 가문 터전인 오토모향(大友鄕)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사이초(最澄)라는 이름의 고승 덴교대사(767∼822년)였다. 일본사 연표에는 “덴교대사라는 시호는 사이초 승려 사후인 서기 866년에 세이와천황(淸和, 858∼876년 재위)이 내렸다”고 쓰여 있다. 덴교대사는 일본 불교 천태종의 개창자로서 매우 유명하다. 사이초 덴교대사는 출가 전 소년 시절의 속명이 미쓰노오비토 히로노(三津首廣野)였다.

지난 11월25일 필자는 20여년 만에 또다시 사이초 덴교대사가 탄생한 오우미 땅 오토모향의 생가터인 쇼겐지(生源寺)를 찾아갔다. 이날 사찰 경내에는 천막을 치고 덴교대사를 위한 축제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절터에는 덴교대사가 태어난 당시부터 있었다는 우물터며 그의 청동 동자상(童子像)이 서있고, 동쪽 벽면으로는 아기가 태어나 기뻐하는 부모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그의 탄생 그림 밑의 설명문에는 덴교대사의 출신을 일컬어 “전교 대사 사이초는 후한(後漢) 효헌제(孝獻帝)의 후손으로서 일본에 귀화한 ‘미쓰노오비토’ 일족이다”라고 고대 중국인설을 내세우고 있었다.

저명한 고대 사학자인 교토대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고대의 고승들 중에는 도래인 계통이 많다. 이를테면 덴표 시대(天平, 729∼749년)의 불교계를 이끈 고승 교기(行基, 668∼749년)의 아버지는 백제계의 고시노 사이치(高志才智)였고, 어머니 하치타노 고니히메(蜂田古爾比賣)인 하치타씨도 백제계의 도래 씨족이었다. 히에이산(比叡山)에 입산해 수행을 거듭하다 당나라에 건너가 구법(求法)하고 귀국해 일본에서 천태종의 바탕을 이룬 사이초 덴교대사도 또한 도래인 씨족의 출신이다. ‘에이산대사전’(叡山大師傳, 9세기 초 一乘忠 저술)에 의하면 사이초의 아버지는 미쓰노오비토 모모에(三津首百枝)이다. 미쓰노오비토의 선조는 도마키왕(登萬貴王)으로서 그는 오진천황(應神, 4∼5세기) 시대에 도래해 시가(滋賀) 땅 오우미에 살면서 미쓰노오비토로 불렸다고 기록돼 있다. 시가 땅의 아야히토계(漢人系, 고대 백제왕족 아치노 오미·阿知使主의 후손들) 씨족의 하나가 미쓰노오비토 가문이었다고 본다”(‘息く交流の史脈’ 2001)라고 사이초 덴교대사 등 일본의 고승들이 백제인 후손임을 상세하게 밝혔다.
◇덴치천황의 사당인 오우미신궁.

일본의 권위 있는 역사 사전에서도 “아야씨(漢氏)는 고대 한반도에서 도래한 씨족이다”(‘각천판 역사사전’ 1976년)라고 해설하고 있다. 따라서 덴교대사가 탄생한 집터 쇼겐지 벽화 설명문에서 “전교 대사 최징은 후한 효헌제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역사 왜곡이다. 이노우에 미쓰오 교수도 “아야씨는 백제인임이 틀림없다”(‘渡來人’ 1987년)고 단정했다.

고대 백제인들의 오토모향 오토모 가문의 조상 신주를 모신 사당 터전도 오우미 지방에서 이름난 명소다. 이곳에는 제39대 고분천황(弘文, 671∼672년 재위)의 능이 있다. 고분천황이란 다름 아닌 제38대 덴치천황(天智, 661∼671년 재위)의 아들 오토모왕자(大友皇子, 648∼672년)다. 오토모라는 이름을 가진 왕자의 능이 백제인들의 오토모향에 안장되어 있다는 것도 주목된다. 이노우에 미쓰오 교수는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를 통해 “오우미의 오토모향에는 오토모노 후히토(大友史)와 오토모노 스구리(大友村主)라는 두 가지 성씨가 있었다. ‘오토모노 후히토는 백제국 사람, 시라루노 나세(白猪奈世)의 후손이다(‘신찬성씨록’ 815)’라고 쓰여 있듯이 백제계의 도래 씨족이다”(앞책)고 단정했고, 두 오토모 가문의 여러 후손들이 벼슬을 받아 왕실로 진출한 과정들도 상세하게 지적했다. 
◇쇼겐지 내 덴교대사 동자상.

오토모왕자의 생부인 덴치천황은 역사에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가. 그는 백제가 망한 지 3년째였던 서기 663년에 2만7000명의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백제 땅 백촌강(白村江)에 보냈던 백제계 왕이다. 덴치천황은 “서기 665년 2월 백제에서 망명해온 백제인 400여명을 오우미 땅 간자키군(神崎郡)에서 살도록 해주었다. 3월에는 백제인들에게 땅을 주었다”(‘일본서기’)고 했다. 이어서 “백제에서 망명해온 남녀 2000명을 아즈마(東國) 땅에 살도록 했다. 백제인들에 대해서는 승속(僧俗·승려와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3년 동인 국비로 먹여 살렸다”(‘일본서기’ 서기 666년 5월조)는 열렬한 백제 구원의 발자취가 뚜렷하다. 그뿐 아니라 덴치천황은 백제국의 관위 계급을 검토하고, 백제 망명 관리 기시쓰슈시(鬼室集斯)에게 소금하(小錦下) 벼슬을 내리는 등 계속해서 망명 백제인들에게 왕실의 높은 벼슬을 주었다고 ‘일본서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뿐이 아니다. 크게 주목되는 사건은 덴치천황이 백제인들을 간자키군에 이주시킨 이듬해인 서기 667년 3월 19일 “왕도를 (나라 땅으로부터) 오우미 땅의 간자키군으로 천도했다”(‘일본서기’)는 사실이다. 백제에서 망명해온 백제인 400여명에게 오우미땅의 간자키군에다 땅과 집을 주어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 고장을 새 왕도로 삼았다. 덴치천황은 나라(奈良)의 왕도를 내버리고 머나먼 오우미 땅의 백제 망명자들이 있는 간자키군으로 천도했다. 그러자 “나라 왕도의 주민들은 천도를 반대하고 천황을 비난하며 간(諫)하는 자들이 많았다. 풍자 노래도 많이 나왔다. 낮이고 밤이고 수많은 방화 사건이 잇따랐다”(‘일본서기’)고 한다.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풍자 노래에 관해 “대부분이 동요 형태로 유행된 노래인데 정치적 목적이 컸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덴치천황의 생부는 제34대 조메이천황(629∼641년 재위)이다. “조메이천황은 나라 땅 구다라강(百濟川) 옆에다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다이지(百濟大寺)를 세우고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한 뒤에는 ‘백제대빈’(百濟大殯) 3년상을 치렀다”(‘일본서기’)고 알려진 백제계 왕이었다. 하여간 일본 역사상 민간에서 왕을 풍간하는 노래는 특히 순수한 백제 계열의 제왕들이 다스렸던 7세기 초엽부터 조메이, 고교쿠, 사이메이, 덴치천황 시대에 집중됐다는 점도 지적해 둔다.

덴치천황은 어째서 백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우미로 천도했을까. 오우미 지역 왕도오쓰경(大津京) 유적 발굴에 참여했던 고고학자 하야시 미치히로(林通博)씨는 그의 저서(‘さざなみの大津京’ 1978)에서 “이 지역에 거주한 백제계 도래인 집단은 식산흥업(殖産興業)과 고도의 토목 기술을 배경으로 협소한 지역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난 생산력과 경제력을 창출해 7세기 중엽에는 막강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본다. 훗날 나가오카경(長岡京, 784년부터의 교토부 지역의 왕도)과 헤이안경(平安京, 794년부터의 현재의 교토시의 왕도)의 왕도 조영(造營)은 오우미 지역을 주름잡았던 도래인 씨족들의 경제적 기반이 바탕이 돼 이뤄진 것이다. 오우미경 천도 역시 도래인의 경제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즉 오우미 일대 백제 도래인들의 뛰어난 산업 기술과 자본이 덴치천황의 오우미 천도에 큰 밑받침이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백제 유민들은 막대한 재력을 가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을 밑받침해 준다. 또한 이시하라 스스무(石原進) 마이니치신문 기자는 “덴치천황은 천도에 필요한 고도의 토목 기술이며 경제적 기반을 도래인 집단에서 찾아냈다. 나라 왕도 일대가 신라와 가까워 늘 침략 위협에 노출됐다는 점도 고려됐다. 망명 백제인들의 우수한 기술로 일본 각지에 조선식 산성(山城)이 구축됐다. 덴치천황의 오우미 천도는 한반도의 정세를 강하게 의식한 극히 군사적인 색채를 띠었다고도 생각된다”(‘古代近江の朝鮮’ 1984)고 분석했다.

그런 오우미 땅에는 지금 덴치천황의 사당인 오우미신궁(近江神宮, 오쓰시 진구초)이 우뚝 서 있다. 이 사당에는 매일 수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덴치천황은 즉위한 지 두 달째인 서기 661년 9월 나라 땅의 왕궁 나가쓰노궁(長津宮)에서 백제 왕자 풍장(豊璋)에게 직관(織冠)을 수여했다. 또한 오노오미 고모시키(多臣蔣枚, 왕도 나라 조정의 조신으로서 백제 귀족인 오노 야쓰마로·太安麻呂의 친조부, 필자주)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는 것도 덧붙여 둔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트리플에스 지우 '매력적인 눈빛'
  • 트리플에스 지우 '매력적인 눈빛'
  • (여자)이이들 미연 '순백의 여신'
  • 전소니 '따뜻한 미소'
  • 천우희 '매력적인 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