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프리 T. 리첼슨 지음/박중서 옮김/까치/2만원 |
1931년 만들어진 그레다 가르보 주연의 ‘마타하리’를 본 영화팬은 이 매력적인 여성 스파이를 오랫동안 기억하게 마련이다. 마타하리는 1차 세계대전 중에 프랑스와 독일을 오가며 군사정보를 판 이중간첩으로, 결국 총살되는 비운의 여성이다. 마타하리뿐 아니라 ‘007시리즈’의 영향 탓인지 스파이는 그 이름만으로도 일반인들의 야릇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실제 벌어지는 각국의 스파이 활동은 개인의 호기심이나 감상적인 차원을 넘어 한 국가의 운명을 가르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지금도 세계에는 매년 100만명이 넘는 인원이 수천억 달러의 비용을 쓰면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 치열한 첩보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 국가안보 문서보관소(National Security Archive)의 수석연구원으로 첩보 분야에 관해 여러 권의 저서를 펴낸 바 있는 제프리 T. 리첼슨는 ‘거의 모든 스파이의 역사’를 통해 역사의 이면에서 20세기를 움직인 스파이들과 그들을 양성한 비밀기관에서부터 당시의 최첨단 기술이 모조리 동원된 활약상을 다루면서 스파이의 역할이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이 같은 첩보전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미국 CIA(중앙정보국)의 1970년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고센스 사회당 후보 제거 작전을 꼽고 있다.
아옌데는 당시 토지개혁, 주요산업의 국유화, 소득 재분배,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국가와의 연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당선이 확실시됐다. 그의 당선이 미국의 이익에 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미국은 CIA를 통해 개입했다. 아옌데를 반대하는 단체의 정치집회와 정치광고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는가 하면 다국적기업의 칠레에 대한 원조를 줄이고, 금융기간의 영업을 중단케 하는 방법으로 그의 당선을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그가 결국 대통령이 되자 칠레 내 쿠데타 세력을 부추겼다. 결국 피노체트를 위시한 쿠데타군의 공격으로 아옌데는 자살인지 아니면 피노체트군에 의한 타살인지 불분명하지만 결국 사망하게 됐으며, 마침내 수년에 걸친 CIA비밀작전은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책은 미국뿐 아니라 영국, 러시아, 이스라엘, 중국,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각국 첩보기관의 주요 작전들은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미국의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의 첩보 수집 과정과 소련의 첩보 및 비밀공작에 이르기까지 등 흥미진진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또 시드니 라일리, 허버트 야들리, 킴 필비, 제임스 앵글턴, 마르쿠스 볼프, 라인하르트 겔렌, 비탈리 유르첸코, 조너선 폴라드 등을 비롯한 유명 스파이 및 망명자들의 약력도 흥미진진하게 서술한다. 군사, 첩보, 모험, 정치 및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는 필독서라고 할 수 있으며, 현대 첩보활동의 핵심요소들이 이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에 관한 장에서는 당시에 활약한 스파이들과 파괴공작원들의 다채로운 모습은 물론, 지상과 해양과 외교를 총망라한 여러 전선에서 벌어진 전쟁의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한 비밀작전들을 소개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장에서는 당시에 유럽과 태평양 전역에서 첩보작전이 차지한 중요성을 살펴보는 한편 연합국 및 나치 소속 요원들의 다양한 업적에서부터 미국과 영국의 암호해독가들이 발휘한 ‘흑마술’에 이르기까지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 이 책은 냉전시대 내내 이루어진 첩보에 관해서도 훌륭한 개관을 선보이며,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 간의 첩보활동과 스파이 스캔들은 물론이고 갖가지 비밀작전과 숨은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다. 말미에서는 오늘날 새로운 무질서와 인종적 갈등 속에서 첩보활동이 지니는 계속된 중요성과 아울러 걸프전에서의 최첨단 기술 활용이며 프랑스 정부의 산업첩보 관련 활동 등을 소개하고 있다.
‘붉은 불사조’의 저자 레리 본드의 서평이다. “20세기 첩보에 관해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명료하기 그지없는 문장력과 통찰력이 돋보이는 분석력을 바탕으로, 리첼슨은 첩보작전이 지금까지의 역사는 물론이고 오늘날의 수많은 사건에도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책의 원문에 사용된 ‘intelligence’와 ‘espionage’는 ‘정보’와 ‘첩보’로 해석될 수 있으나 번역에서는 모두 ‘첩보’로 통일했다. 국내에서는 ‘첩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정보’란 용어를 많이 쓰고 있으나 이는 최근의 통신기술의 발달로 중요성이 더해진 ‘information’과 혼용할 수 있는 데다 스파이의 역사를 다룬 만큼 ‘첩보’ 쪽에 가깝다는 판단이다.
박태해 기자 pth1228@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