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언론도 TV토론에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했다. CNN은 두 부통령 후보가 토론하는 화면 아래에 그래프를 넣었다. 오하이오주 남녀 주민들이 후보 토론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실시간으로 반영한 이 그래프는 후보들이 한마디 한마디할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유권자들의 민심을 전달해주었다. 50개주 중에서 유독 오하이오의 표심을 보여준 것은 TV토론의 역사가 시작된 1960년 이래로 오하이오주가 선택한 후보가 13번 모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신기한 점은 후보가 확신에 찬 어조로 자기 주장을 하거나, 서민들의 입장에 동조하거나, 조지 W. 부시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할 때마다 그래프는 일제히 상승곡선을 탔다. 특히 여성 유권자들은 부엌, 자녀, 교육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남성들보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후보들을 바라보는 미국의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었다. 결국 바이든의 경륜이 윙크와 미소로 무장한 페일린의 패기에 판정승을 거뒀지만 페일린 효과는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했다. 왜 그럴까.
일반적으로 국민의 정치 불신이 높아지면 후보의 참신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 기존 정치에 물들지 않은 인물이 나와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 주기를 바라는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이삼십년 동안 선출된 미국 대통령을 보면 로널드 레이건, 지미 카터,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같이 워싱턴 경험이 없는 주지사들이 선택되었다. 이번 선거에서도 버락 오바마나 페일린 같은 신인들이 발탁되고 전통 공화당과 다소 거리가 있는 매케인이 후보로 지명받을 수 있었다. 그 참신함의 위력으로 초선 의원 오바마가 35년간 상원을 한 전설적인 선배를 부통령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페일린을 제외하면 행정 경험이 있는 후보가 없다. 매케인, 오바마, 바이든까지 모두 상원의원 출신이다. 페일린만이 시장, 주지사 경험이 있다. 부통령 후보토론에서도 책임질 정책이 없는 바이든은 부시행정부와 매케인을 비난하는 데 토론 시간 대부분을 할애하며 전형적인 도전자형 네가티브 전략을 사용했다. 반면 페일린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이야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인간적인 면에서도 페일린은 명문가 출신에 재벌 부인을 둔 매케인, 하버드 로스쿨 출신의 엘리트 오바마, 변호사에 6선 의원인 바이든에 비하면 서민적이고 친근하다. 1984년 부통령 후보 성 대결에서 부드러움만 강조한 제럴딘 페라로 후보와는 달리 미국 최고의 외교전문가를 당당하게 상대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페일린은 여고생 딸의 임신, 잇단 말 실수 등 위기 관리를 통해 이슈를 선점하는 독특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선거에서 새로움과 변화는 중요하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새 인물이 국정 최고 책임자가 되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다. 국민의 심리적 기대와는 달리 새 인물의 경험이나 능력이 부족할 경우 국가 전체가 시행착오를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이 모험을 계속하는 것은 워싱턴에서 고립과 고전을 면치 못한 카터도 있었지만, 레이건이나 클린턴처럼 선방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두 번의 대통령 후보 토론이 남아 있다. 그 토론에서 미국이 당면한 경제위기를 타계할 두 후보의 의지와 비전이 2008년판 ‘변화’의 키워드가 될 것이다.
세종대 석좌교수·전 외교부 대사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