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나주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박 대위는 가난이 싫어 중학교 2학년 때인 1982년 집을 뛰쳐나와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자장면 배달원으로 밤낮을 일했지만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나는 등 유년 시절은 어두운 기억들로 가득했다.
4년 뒤 막내동생이 갑작스런 죽음을 접하고 ‘동생 몫까지 살겠다’는 각오로 야채행상을 하며 밤엔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주경야독의 땀방울로 1988년 고입검정과 1989년 대입검정고시에 연달아 합격하는 기쁨을 맛봤다. 하지만 박 대위는 대학 진학 대신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겠다는 말에 주위 사람들이 비웃었다”면서 “그러나 한 유학업체 사장의 도움으로 1990년 8월 워싱턴의 이스턴 주립대학에 조건부로 합격했다”고 말했다.
스물 세 살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낡은 중고차와 학교 화장실에서 숙식을 해결해야만 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대학 경비원 모집에도 응했다. 낮엔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으로, 밤엔 학교 경비원으로 시달리면서 일주일에 사흘은 꼬박 밤을 새워야만 했다. 그 결과 그는 대학 4년과정을 2년 반 만에 마치는 기적을 일궈냈다. 그러다가 1998년 미군에 입대한 그는 장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장교가 되려면 먼저 미국 시민권이 필요했다.
“무작정 미시시피주 상원의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인생 역정을 모두 털어놓고 시민권을 받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박 대위는 당시를 떠올렸다.
독일에서 근무 중이던 2000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박 대위는 사관후보생(OCS)시험에 합격해 14주간의 고된 훈련을 마치고 그 해 12월 장교로 임관했다.
2001년부터는 미군 수송부대 소대장과 지원중대장을 맡았고, 군 복무 중에도 학업을 계속해 알래스카 주립대학원에서 물류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4년부터 1년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근무하면서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2006년 1월부터 한국에서 근무 중인 박 대위는 작년에는 육사에서 ‘한미 동맹’이란 주제로 생도들에게 특강을 하기도 했다.
야채를 팔던 소년이 석사 출신의 미국 장교가 된 비결을 묻는 질문에 박 대위는 “목표를 크게 세우고 이것 아니면 죽는다는 각오로 매달리면 성공한다”면서 “앞으로도 도전하는 삶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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