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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⑬옛 문헌에 나타난 한반도 지진

관련이슈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입력 : 2008-05-21 01:34:34 수정 : 2008-05-21 01:3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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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해 4회꼴 발생 기록
군왕들은 '하늘의 꾸짖음' 인식

◇조선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은 “지진은 하늘과는 무관한 땅속의 빈 공간에서 연유한다”고 보았다.
중국 쓰촨성 일대를 휩쓴 대지진으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인간을 우주로 보내고, 최첨단 과학기기의 발명으로 과거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 지금이지만,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인 듯 보인다. 그나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 지역은 지진의 중심권에는 벗어나 있어서 지진으로 인한 대참사는 겪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반도가 지진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조선왕조실록’에 1967건 등장하는 지진 관련 기록은 한반도 역시 지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곳임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지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지진 관련 기록

문헌 기록 중 지진에 관해 체계적인 내용을 담은 최초의 책은 ‘삼국사기’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보이는 지진 기록은 매우 간단하고, 지진의 발생 건수도 비교적 적다. 모두 107건의 지진 발생을 기록하고 있는데, 1년 평균으로 잡으면 0.1회 정도 발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렇다고 삼국시대가 후대에 비해 지진이 드물게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경주, 백제의 위례성과 부여, 고구려의 국내성과 평양 등 삼국의 수도에서 일어난 지진만 기록했기 때문에 빈도가 낮은 것이었다.

이것은 이 시대의 지진 관측이 수도권에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지진 관측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삼국의 전 영토 안에 일어난 지진의 횟수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의 지진 관련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국가 차원의 관심이 매우 컸음을 미뤄 짐작케 한다.

◇세종, 중종, 성종실록 표지.
고려시대의 지진에 관한 기록은 조선전기에 편찬된 역사서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타나 있다. 475년간 194건의 지진이 보고돼 있어서 1년 평균 0.4회로 삼국시대보다는 빈도가 높다. 이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고려시대가 삼국시대보다는 체계적으로 지진을 관측했기 때문이다. ‘고려사’에서는 천문 현상을 기록한 ‘오행지(五行志)’보다도 왕실의 정치를 기록한 ‘세가(世家)’ 부분에 수록된 것이 주목된다. 지진을 주로 본문에 해당하는 ‘세가’에 넣은 것은 지진을 정치와 연관시켜 보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 ‘조선왕조실록’과 지진

“유시(酉時 오후 6시경)에 세 차례 크게 지진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레 소리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城堞)이 무너지고 떨어져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밤새도록 노숙하며 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고로(故老)들이 모두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하였다. 팔도가 다 마찬가지였다. (…) 얼마 있다가 또 처음과 같이 지진이 크게 일어나 전우(殿宇)가 흔들렸다. 상이 앉아 있는 용상은 마치 사람의 손으로 밀고 당기는 것처럼 흔들렸다. 첫 번부터 이때까지 무릇 세 차례 지진이 있었는데 그 여세가 그대로 남아 있다가 한참만에야 가라앉았다. (…) 영의정 정광필이 아뢰기를, ‘지진은 전에도 있었지만 오늘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신 등이 재직하여 해야 할 일을 모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은 1518년(중종 13) 5월15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큰 지진이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실록뿐만 아니라 조광조의 문집인 ‘정암집’에도 ‘(1513년) 5월16일에 상이 친히 정사를 보는데 지진이 세 번 일어났다. 전각 지붕이 요동을 쳤다’고 하여 이 날의 지진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가 자신의 개인 문집에 지진 상황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의 지진이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1392년(태조 1)부터 1863년(철종 15)까지 472년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지진 건수는 무려 1967건에 이른다. 대략 1년에 4회꼴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보다는 빈도가 훨씬 높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지진 발생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기보다는 지진에 대한 관측이 정밀해지고, 보고 체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 천문 현상과 지변을 관측하는 관상감이라는 관청을 두었고, 관상감에는 천재지변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여 ‘관상감 일기’를 남겼다. 실록을 편찬할 때는 사관들이 쓴 사초(史草)와 함께 각 관청의 업무 일지인 시정기를 참고하였는데, 시정기인 ‘관상감 일기’에 기록된 지진 관련 내용이 실록에 포함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것이다.

# 자연재해의 원인을 정치에서 찾아

지진에 관한 보고는 진도(震度)가 극히 약한 경우는 지진이 발생한 지역만을 언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지진의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지진이 발생한 지역과 시간, 소리의 크기, 피해 정도까지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지진에 대한 국가의 대응은 어떠했을까? 중종 시대에 일어난 지진에 대한 보고와 함께 조정의 대응을 실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번 살펴보자.

◇‘성호사설’의 ‘지진풍뇌’ 부분.                         ◇‘중종실록’의 지진 관련 기사.

“(중종이) 전교하기를, ‘이번에 있은 지진은 실로 막대한 변괴라 내가 대신들을 불러 보고자 하니 시종은 그들을 부르라’고 하였다. 예조판서 남곤 등이 먼저 입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한재가 심한데 이제 또 지진이 있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재앙은 헛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연유가 있는 것인데 내가 어둡고 미련해서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노라’고 하자, 남곤이 아뢰기를, ‘신이 처음 들을 때에 심신이 놀랐다가 한참 만에 가라앉았으니, 상의 뜻에 놀랍고 두려우실 것은 더구나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요즈음 경상·충청 두 도의 서장(書狀)을 보니 모두 지진이 있었다고 보고하였는데, 서울의 지진이 이렇게 심한 것은 뜻밖입니다. 옛날 역사서를 보면 한나라 때 농서(西)에 지진이 일어나 1만여명이 깔려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늘 큰 변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지진도 가옥을 무너뜨린 일이 있지 않습니까? 땅은 고요한 물건인데, 그 고요함을 지키지 못하고 진동하니 이보다 큰 변괴가 없습니다. 상께서 즉위하신 뒤로 사냥이나 토목 공사나 성색(聲色)에 빠진 일이 없고, 아랫사람이 또한 성의(聖意)를 받들고 모두 국사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태평시대라고는 할 수 없어도 소강(小康)이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재변이 하루하루 더 심각하니, 신은 고금과 학문에 널리 통하지 못하여 재변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중종실록’ 중종 13년 5월15일)
◇조선시대의 천문·기상관측 업무를 관장하던 관상감 관천대. 서울 종로구 원서동 206-2 현대그룹 본사 경내에 있다.

위의 기록에서 중국 역대의 대지진을 언급한 것과, 지진 발생 원인을 정치에서 찾으려 한 점이 주목된다. 남곤의 보고에 대해 중종은 “오늘의 변괴는 더욱 놀랍고 두렵다. 내가 사람을 쓰는 데 항상 잘못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친정(親政)이 끝나자 곧 변이 일어났고, 또 오늘의 친정은 보통 때의 친정과는 다른데도 재변이 이와 같으니, 이 때문에 더욱 두려운 것이다”고 하여, 왕이 정치를 잘못한 것이 지진의 원인인가 하면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임진왜란 중인 1594년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자 선조는 왕세자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비추기도 하였다. 선조는 지진의 원인을 자신의 부덕의 소 치라고 생각하고 하늘의 꾸짖음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다. 지진을 과학적인 기준보다 도덕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지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 이익의 과학적인 지진 인식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평가를 받는 이익은 그의 저술 ‘성호사설’에서 지진에 대한 과학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익은 천지문(天地門)의 ‘지진풍뇌’라는 항목에서 이익은 먼저 일본에는 들이 많고 산이 적어서 지진이 많다고 전제한 후, 지진은 하늘과 전혀 무관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지진은 땅 속의 빈 곳에서 생겨나는 진동이며, 땅 속의 빈 곳에서 소리가 울리는 것이 지진이며, 땅이 푹 꺼져 들어가는 것이 지함(地陷)이라고 하였다. 이익은 우주자연에는 큰 힘이 존재하는데, 물체가 없는 빈 곳에도 이러한 힘이 있다고 보았다.

이익은 땅 속이 비어 있다는 증거로 석굴(石窟)을 예로 들기도 하고 강물이 도중에 끊기는 곳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익은 지각 변동에 대해 과학적으로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지진을 땅 속의 빈 공간에서 연유한 것으로 해석하여 보다 과학적으로 접근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여러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토대로 한반도에 발생했던 지진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지진 발생 지역과 함께 ‘집이 흔들렸다’ ‘들짐승들이 놀라 숨었다’ ‘산 위의 바위가 무너졌다’ 등 지진의 규모를 추론할 수 있는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꼼꼼하게 정리된 역사 속 지진 관련 기록은, 내진(耐震)이 인류 생존의 중요한 관건이 되는 원자력발전소 건설 등 현대의 건설 현장에서도 적극 참고되어야 할 것이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유시(酉時 오후 6시경)에 세 차례 크게 지진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레 소리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城堞)이 무너지고 떨어져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밤새도록 노숙하며 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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