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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얼굴을 닮았다는 중국 천목산의 '불면암(佛面岩)'. |
중국 천목산 불면암(佛面岩)이 한국 불자들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명산의 기암괴석 중에는 부처 형상을 닮은 바위가 많다. 설악산 마등령(1200m대 고지) 봉정암 주변의 바위들이 그런 것들이다. 한 바위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옆 모습을 빼닮았다. 중국 저장성(浙江省) 최고봉 천목산(1506m)에도 부처의 얼굴을 닮은 바위가 있어 놀랍기도 하고, 반가웠다.
불교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은 지난 10~13일 108명으로 구성된 순례단을 인솔하고 중국 동남쪽 저장성과 장쑤성(江蘇省) 일대의 선종(禪宗) 사찰을 돌아보는 여정을 가졌다. 이들 유적지에는 화두를 참구해 깨달음에 이르는 불교의 빼어난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을 행한 중국 선사들의 체취가 묻어 있다. 간화선은 중국 남송 시대 대혜종고(1089~1163) 선사가 주창했고, 고봉원묘 (1238~1295) 선사 때 꽃을 활짝 피웠다.
순례 여정은 저장성 닝보(寧波) 아육왕사에서 시작됐는데, 이곳에서 서쪽으로 300여㎞ 떨어진 항저우(杭州) 북쪽 임안(臨安)에 바로 천목산이 있고, 그 산 중턱에 부처님 얼굴을 닮은 ‘불면암’이 있었다. 의외의 큰 소득이었다.
천목산에는 고려때 대각국사 의천이 지은 고려사와 중국 임제종 양기파인 고봉 선사가 주석했던 선원사가 있다. 지난해 항저우시가 등산로를 닦은 뒤 개방한 첩첩산중의 천목산 전체가 고봉 선사의 치열한 구도현장. 산자락에서 버스로 고도 1000여m 지점까지 오르면 산장이 나오고, 여기서부터 돌계단으로 단장된 하산길이 시작된다. 이른바 ‘천년고도(千年古道)’다. 사암으로 된 돌계단은 무려 8㎞, 2시간30분 거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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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항저우시는 지난해 천목산에 돌계단으로 된 등산로를 만들고 일반에 개방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고봉 선사의 죽음을 내건 수행처 '사관(死關)'이 나온다. |
돌계단 양 켠에는 수령 600년∼1000년의 삼나무가 빼곡하고, 등로 곳곳에 고봉 선사의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삼나무는 저마다 육중한 몸매를 뽐내며 키 자랑을 한다. 나무들이 다들 굵고 큰 데, 유독 한 나무에는 ‘대수왕(大樹王·나무의 왕)’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그런가하면 산책로 상에는 나무 9그루의 뿌리가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을 보호해 놓고, ‘구룡벽(九龍壁)’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여놓았다. 무엇이든 의미를 부여하길 좋아하는 중국인의 과장술(뻥)을 보는 것같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맨 처음 만나는 고봉 선사의 선적지는 조그만 암자인 ‘개산노전(開山老殿)’. 고봉이 천목산에 머물며 처음으로 산문을 열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고봉의 금동좌상과 그 제자인 중봉과 단애 스님의 좌상이 좌우로 배치돼 있다. 1319년 고려의 심왕(沈王)이 중봉 스님에게 하사했다는 가사 등 유물도 보관돼 있다. 개산노전을 빠져나와 고봉 묘, 세발지(洗鉢池) 등을 지나 당도한 곳은 ‘고봉탑원(高峰塔院)’이라는 팻말이 붙은 ‘사관(死關)’. 고봉의 치열한 구도현장이다. 고봉 스님은 개산노전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자 서봉 동공동에 ‘사관’이란 이름의 토굴을 짓고 숨어들었다. 길이 없던 시절, 천길 절벽 사이에 마련된 이 수행처는 그야말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무문관(無門關)이요, 죽음의 문이었다. 당시 사관은 줄을 타지 않으면 오를 수 없을 정도로 험했고,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토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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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선사의 수행처 사관. 옛날의 위치를 찾아 후대에 조성된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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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 안에는 두발승 모습을 한 고봉 선사의 좌상이 모셔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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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 앞 전경.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경사가 심하고 높다. |
고봉은 이곳에서 시봉조차 두지 않고 입적할 때까지 15년간 죽음을 각오하고 면벽수도했다. 철저히 죽어서 대자유를 얻기 위함이었다. 제자 중봉은 훗날 고봉을 이렇게 칭송했다.
“천목산이 높다고 하나 고봉의 높이를 넘지 못하고, 18 지옥의 관문이 험하다고 하나 사관의 험준함에 비교할 수 없네”
고봉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철저히 죽지 않고 사관을 말할 수 없었다. 중생은 닫힌 세계를 봤지만 고봉은 그 안에서 열린 세계, 영원한 세계를 본 것이다. 고봉에게 사관은 곧 깨달음의 세계였다. 사관 옆에 지어진 사자구(獅子口)에는 ‘철저히 죽어야만 산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고봉의 사자후가 쓰여있다. 순례단은 저마다 숙연한 표정이었다.
사관을 돌아보고 막 내려가려는 데, 한 보살(여성불자)이 사관 건너편 아득한 절벽을 보라고 손짓했다. 삼나무로 둘러싸인 가파른 경사면에 큰 바위가 하나 보이는데, 고개 숙인 부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른바 ‘불면암’이다. 아닌게 아니라, 부처의 얼굴을 많이 닮았다. 보살의 배려가 아니었으면, 멀리까지 와서도 모르고 지나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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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 건너편 아득한 절벽에 부처님 얼굴을 닮은 바위가 보인다. '불면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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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원거리로 잡은 불면암. |
그러고 보니 고봉이 수행하던 곳은 그 자체로 대자연이 만들어낸 커다란 법당이었다. 이곳에서 고봉은 스스로 법(진리)을 구하고, 법을 나누어 주었으며, 법이 되었으리라.
공산화와 문화혁명 등으로 중국에서 불교는 옛 모습을 잃어버렸고, 일본도 수행법이 변질되면서 현재 간화선 수행은 한국불교 조계종이 유일하게 그 맥을 잇고 있다. 특히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는 대혜 스님의 ‘서장(書狀)’과 함께 한국 간화선의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 고봉은 58세 되던 해 제자들에게 뒷 일을 맡기고 열반에 든다. 그가 남긴 임종게는 이렇다.
“와도 사관에 들어온 일이 없으며/가도 사관을 벗어나는 일이 없네/쇠로 된 뱀이 바다를 뚫고 들어가/ 수미산을 쳐서 무너뜨리도다”
이날 순례단을 이끈 전 태백산 각화선원장 고우 스님은 “중생은 ‘공(空)’이 아무 것도 없고 허무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불교에서 공은 지혜요, 진리”라며 “공을 이해하면 모든 존재가 하나임을 느끼고 공동체 의식도 생긴다”고 말했다. 어쩌면 공을 통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인지 모른다. 항저우(중국)=정성수 기자 hul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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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의 수행처인 사관을 가기 직전에 만나는 '대수왕(大樹王)'. 키가 크기도 하지만 성인 3~4명이 양 팔을 둘러야 나무를 감쌀 정도로 둘레가 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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