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흐 해석의 대가로 인정받는 쉬프가 지난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내한 독주회를 열었다.
헝가리 태생인 쉬프(55)는 음악적 통찰과 완벽한 기교 덕에 모든 피아노 연주자에게 교과서로 통한다. 이번이 첫 한국 방문이다.
그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팬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는 듯 쉬프는 겸손함과 카리스마를 넘나들며 청중을 안내했다. 2500석 콘서트홀의 90% 이상을 메운 관객들은 숨소리조차 연주에 방해될까봐 노심초사했다. 세 번의 앙코르가 이어진 공연은 밤 10시 반이 훌쩍 넘어서야 끝이 났다.
이번 공연은 슈만의 ‘환상곡 C장조’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 그리고 바흐의 작품들로 구성됐다. 모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들이다. 시작은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 제5번 G장조’였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고 화사했다. 주로 피아노 고음부에서만 손이 움직일 정도로 경쾌한 곡이다.
마치 추운 겨울을 지나고 따뜻한 봄 햇살에 얼굴을 내미는 새싹들처럼 희망이 넘친다. 건반이 통통 튈 때는 강아지들이 뛰노는 듯하고 리드미컬하게 좌우로 움직일 땐 산들바람이 귓가를 간지럽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쉬프의 진가는 슈만에서 드러났다. ‘환상곡 C장조’는 슈만의 피아노 곡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 총 3악장 가운데 앞의 두 악장은 환상적이며 열정적으로 공연하고 마지막은 여리고 느리게 연주해야 하는 곡이다. 약 30분간 쉬프는 조율사처럼 피아노 건반에 최적의 소리를 찾아줬다. 전반부에선 단단하면서도 화려한 타법으로 명징한 소리를 끌어올리더니 3악장에선 한없이 부드럽게 건반을 어루만졌다. 특히 마지막 10초 정도의 침묵은 긴 여운을 남겼다. 경건함과 엄숙함의 극치였다. 그의 얼굴에는 “이 곡을 연주하게 하시니 감사하다”는 기도가 엿보였다.
키에르케고르식으로 말하면 그는 피아노 앞에선 단독자 같았다. 때로는 그랜드 피아노와 경쟁하며 당당함을 보여주다가도 어느 순간 나약한 인간의 왜소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렇게 쉬프는 절대자의 목소리를 피아노로 번역해 내는 역할을 훌륭히 소화했다.
이성대 기자 karisn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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