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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아문센◇엘리자베스 1세◇린든 B 존슨◇에드거 후버◇마틴 루터 킹◇로버트 F 케네디◇메리여왕◇로버트 F 스콧(왼쪽 위 부터 시계방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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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에번스 지음/이종인 옮김/이마고/1만5000원 |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다. 애국심이 넘쳐난 영국 언론이 스콧 영웅 만들기에 나선 것. 언론은 사망한 스콧의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을 내세워 그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한편 아문센을 한없이 깎아내렸다. 유럽 변방 소국이 세계를 주름잡던 대영제국을 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당시 유럽에선 남극점을 먼저 정복한 아문센보다 스콧을 더 위대한 탐험가로 추앙했다. 아문센은 자서전에서 최후의 역공을 취했지만 역사는 이미 한참 흘러간 뒤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두 영웅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영국)과 조지 패튼 장군(미국)의 비뚤어진 라이벌 관계도 역사에 오점을 남긴 사례로 유명하다. 수비형 전략가 몽고메리와 공격형 전략가 패튼의 노선과 라이벌 관계에서 비롯된 불화는 1945년 2월에 끝낼 수 있었던 2차대전의 종결을 6개월이나 늦췄다. 일제 학정에 시달리던 우리의 광복이 6개월 지체된 건 물론이다. 둘 다 실리보다 명예를 좇다 발생한 불행이었다.
그루지야의 구두수선공 아들인 요시프 스탈린과 유대계 대지주의 아들인 레온 트로츠키는 성장배경만큼이나 서로 너무 달랐고, 싸움 방식도 달랐다. 험하게 살며 닳고 닳은 스탈린은 사람 다루는 솜씨에 능수능란했고, 이론에 해박하고 웅변에 강했지만 고지식했던 트로츠키는 스탈린 노선을 비판하다 망명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망명지에서도 스탈린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자 스탈린은 멕시코까지 자객을 보내 그를 제거한다.
지적인 독신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매력 덩어리 미망인 메리 여왕이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25년간 벌였던 숨가쁜 싸움은 음모와 질투 그리고 시기심이 합쳐진, 그야말로 역사적인 라이벌 대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소문난 미모와 매력에 병적인 질투심을 보였고,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메리의 재혼 상대자까지 구하고 나섰다. 두 번의 잘못된 결혼으로 스코틀랜드 왕위까지 빼앗기고 잉글랜드에서 구금생활을 하던 메리는 끊임없이 엘리자베스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사형명령장에 서명함으로써 메리는 단두대 이슬로 사라진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찰스 1세와 이에 맞섰던 올리버 크롬웰도 치열한 경쟁상대였다.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사형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찰스 2세가 왕정 복고를 이룬 후 자신은 부관참시된다.
2002년 선보였던 ‘음모와 집착의 역사’를 개정한 ‘라이벌’은 이외에도 상대방에 대한 음모와 술수로 자신을 파멸시킨 미국의 두 정객 애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 왕비가 되고 싶었던 미국 여인과 왕비가 되기 싫었던 영국 여인 심프슨 부인과 퀸 마더, 암살당한 존 F 케네디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야심가 린든 B 존슨과 동생 로버트 F 케네디, 그리고 20세기 미국의 우상 에드거 후버와 마틴 루터 킹 등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상 10대 라이벌을 파헤쳤다.
책은 또한 등장 인물들의 영웅 이미지에 가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곳곳에 삽입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세기의 러브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심프슨 부인과 영국 왕 에드워드 8세의 사랑 뒤에는 심프슨 부인의 뛰어난 성적 테크닉이 조루였던 에드워드 8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연이 담겨 있고,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유난히 여자를 밝혀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한 날 밤에도 워싱턴의 호텔에서 섹스 행각을 벌인 사실이 FBI에 도청당했다는 내용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의 중압감 탓에 심한 우울증에 걸려 가까운 지인을 만나면 소리 내어 흐느껴 울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책은 역사란 결국 인간들의 갈등과 투쟁의 서사시임을, 역사적 영웅들의 밝은 외양 너머에는 그들의 너무나 평범한 인간적 야망과 질투, 공포, 자존심이라는 어두운 감정이 숨어 있으며, 그것이 라이벌을(때로는 자신을) 파국으로 내몰고 역사를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선회시켰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묘한 건, 앙숙 관계였던 라이벌이 있었기에 이들은 역사상 더욱 빛난다는 점이다.
라이벌-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 속 10대 앙숙들/콜린 에번스 지음/이종인 옮김/이마고/1만5000원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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