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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한의 한창우 회장이 집무실 문을 열고 환한 표정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한 회장은 일본 전국 220여개의 빠찡꼬 객장을 운영하는 ㈜마루한과 20여개 계열 기업을 거느리고 있다. |
경제대국 일본에서 22위 부자로 알려진 ‘㈜마루한’의 한창우(77) 회장. 제일동포 1세인 한 회장에게는 이런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의 성공 이면에는 기막힌 발상이 있었다. 빠찡꼬 하면 떠오르는 어둡고 칙칙한 도박 이미지를 떨쳐내고 건전한 여가놀이로 유도하는 갖가지 아이디어가 그것이다. 한 회장에게는 늘 ‘빠찡꼬는 여가놀이로 즐겨야 한다’는 신조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신념 덕에 ‘한국인 차별’이라는 높은 장벽을 넘어 지금은 일본 빠찡꼬 업계를 좌지우지하는 일인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일본어판 포브스지는 지난해 5월 일본 부호 30인을 발표했다. 한국계로는 일본 정보통신 재벌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이 순자산 4720억엔으로 8위였고, 한 회장은 1210억엔으로 22위에 올라 2005년부터 3년 연속 30대 부자에 선정됐다. 지난해 마루한의 매출은 1조5000여억엔을 기록했다. 2010년까지 매출목표를 5조엔으로 잡고 있다. 이 정도면 일본 빠찡꼬 업계를 휘어잡을 만한 자금력으로 통한다. 현재 연인원 1억2000여만명이 마루한을 찾고 있다. 일본 인구 1억2700여만명에 육박하는 규모다. 역앞이나 주요 교차로 등 교통요지에 자리 잡은 마루한의 점포만도 220개에 달한다. 일본 경제가 곤두박질할 때도 마루한은 성장을 거듭해 거의 한 세대 만에 성공의 결실을 얻었다.
1945년 10월22일 밤 시모노세키 해안. 열다섯 살에 불과한 한 한국 소년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부산발 밀항선에서 내렸다. 소년 한창우가 일본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3시간 걸린다던 밀항선은 20시간의 표류 끝에 겨우 육지에 도달했다. 손에는 모친이 쥐어준 쌀 두 말과 영어사전이 전부였다.
밀항선을 탄 것은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끌려갔다 일본에 정착한 큰형의 권유 때문이었다. “우리집은 가난해서 너는 한국에선 학교 못 다닌다”는 형의 말에 일본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검정고시로 고교졸업 자격을 딴 그는 도쿄에 있는 호세이대학 경제학부를 마쳤다. 학비를 벌기 위해 식당 점원에서 막노동까지 닥치는대로 궂은일을 했다. 호세이대학에는 당시 마르크스 경제학 열풍이 한창이었다. 그도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을 접하면서 귀국해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하지만 6·25전쟁이 터지면서 귀국의 꿈을 접었다.
한 회장이 빠찡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매형의 영향이 컸다. 매형은 교토에서 시골 전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인구 1만5000명의 소도시 미네야마에서 게임기 20대에 불과한 조그마한 빠찡꼬 가게를 운영했다. 1952년 일본은 실업자가 넘쳐났다. 매일 시위대가 데모를 하는 등 좌우익이 대립하는 극심한 혼란기였다. 그도 역시 대학 졸업 후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평소 음악과 미학에 남다른 관심이 있던 그는 프랑스 유학을 꿈꿨다. 매형에게 찾아가 여비를 꿔달라고 말했다가 같이 일하자는 권유에 그만 눌러앉아 버렸다. 그러나 인근에 대형 빠찡꼬가 들어서면서 찾는 손님이 줄었고, 결국 매형은 가게를 청산하고 한국으로 간다고 했다. 그는 매형에게 매달렸다.
“성공하면 시세 두 배를 쳐줄 테니 인계해 달라고 졸랐어요. 가진 돈이 한푼 없으니 공짜로 가게를 넘겨 달라는 거였죠. 그렇게 마루한을 창업했습니다.”
한 회장은 게임기를 1년여 만에 120대로 늘리는 영업 수완을 발휘했다. 돈을 잃은 손님에게는 담배도 주고, 구슬도 주면서 관리하자 단골이 불어났다. 미네야마에서 클래식 음악다방도 개업해 성공했고, 1967년에는 당시 인기를 끈 볼링장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볼링장 사업은 시련의 시작이었다. 수십억엔을 들여 120개 레인의 대형 볼링장을 개업했으나 볼링 붐이 갑자기 시들해지면서 적자가 쌓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오일쇼크가 오면서 아예 손님이 끊겨버렸고, 빚은 순식간에 당시로는 거금인 60억엔대까지 불어났다. 앞길이 막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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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주변 지바현에 있는 빠찡꼬 점포. |
“날마다 자살을 생각했지요. 그러나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나서는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죠.”
그런데 채권은행들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돈을 더 빌려 가라”고 했다. 은행 측에서는 당장 파산시키기보다는 그의 사업 능력과 신용을 믿고 더 투자하는 것이 원금 회수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저는 한국인이었기에 무엇보다 신용을 생명처럼 지켜왔죠. 결국 신용이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마지막 밑천이 됐습니다.”
한 회장은 볼링장을 개설할 목적으로 물색해놓은 목 좋은 곳에 빠찡꼬 점포를 열었다. 마침 그 무렵 일본 전역에 빠찡꼬 붐이 일면서 매출이 급신장했다. 한 회장은 42세 때 진 60억엔의 빚을 52세 때 모두 갚을 수 있었다.
그가 10년 만에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손님들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빠찡꼬 만들기에 전념한 덕분이었다. 한 회장은 목 좋은 곳에 문을 열었다가 영업 미숙으로 망해가는 점포를 인수해 흑자로 되살려놓는 기법을 구사했다. 망한 원인을 따져보고 그것을 제거하자 손님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빠찡꼬 사업 초년 시절 미네야마에서 터득한 영업 전략이었다. 그는 손님을 먼저 배려했다. 돈을 많이 잃은 고객에게는 구슬을 융통해 주기도 했고, 담배 냄새 제거시설이나 샤워시설을 갖추는 한편 카페 분위기를 연출했다. 종래 빠찡꼬는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한 회장의 빠찡꼬 객장은 달랐다. 최고급 인테리어로 실내를 꾸며 일류 호텔 카지노 시설을 연상케 한다. 그러자 다른 업소들도 금방 따라했다.
덕분에 한 회장은 빠찡꼬의 이미지를 바꾼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인도 하지 못한 빠찡꼬 경영비결을 한 회장이 먼저 터득한 것이다. 그는 빠찡꼬 매장을 일류 ‘레저 장소’로 변화시켰다. 시장을 보던 아줌마도, 동네 어른들에게도 심심풀이나 기분전환을 위해 조금만 하라고 권했다.
그는 현장에 있는 사원들의 목소리에서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얻어냈다. 하루 품삯으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라도 그의 의견에 귀 기울였고, 철저한 고객 중심의 영업 방침을 세웠다. 그저 그런 빠찡꼬 업자로 남았을지도 모를 한 회장을 오늘의 사업가로 만들어준 경영 노하우였다.
철저한 직원 교육도 마루한의 고속성장을 뒷받침한 비결 중 하나다. 특히 일본에서 빠찡꼬라면 조직폭력배가 연루된 사업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뿌리 깊은 만큼, 이런 인식을 털어내는 게 급선무였다. 한 회장은 “예의·윤리·서비스 정신은 물론, 회사의 이념과 비전을 공유하도록 직원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며 “직원들에게 자신의 아이나 손자들을 취직시키고 싶은 회사를 만들어 달라고 당부한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인지 1만여명의 직원 중에는 도쿄대 등 유명 대학 출신도 적지 않다. 세칭 일류대를 나와 빠찡꼬 업소에 취직한다면 누구나 고개를 갸우뚱할 만하지만 마루한이라면 일본인들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이미지가 개선됐다고 한 회장은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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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시내 빠찡꼬 객장 내부. |
한 회장은 “마루한을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 키우는 게 꿈”이라며 지금은 동남아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시작해 세계로 퍼진 것이 ‘컵라면’과 ‘가라오케’인데, 이제 빠찡꼬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는 해마다 30∼40개 점포를 신설하는 ‘초공격적 경영’에 나섰다. 일본 빠찡꼬 업계의 시장 규모는 35조엔 안팎. 일본 전체 미디어 광고액의 6배가 넘고, 복권 산업의 30배에 이르는 규모다. 마루한의 현재 점유율이 5% 내외여서 경영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해나갈 수 있다는 게 한 회장의 생각이다.
한 회장은 2001년 귀화했다. 대신 일본식으로 개명하지 않고 이름은 그대로 ‘한창우’로 했다. 그의 국적 변경에 대해 재일동포 사회로부터 비판의 소리도 들린다. 이에 대해 한 회장은 “재미동포가 미국 국적(시민권)을 취득하는 것은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다. 그러니 재일동포가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것을 비난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재일동포 2, 3세로 내려갈수록 일본 주류사회에 착실히 뿌리내리고 자신을 발전시키는 계기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동포끼리 비방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의 모국 사랑은 동포사회에서도 유별나다. 세계한상대회를 비롯해 자신이 회장인 세계한인상공인연합회 등의 연례 대회를 위해 매년 3∼4차례씩 한국을 찾는다. 그때마다 고향에 거액의 장학금도 건넨다. 19년 전 30억원을 출연해 설립한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에 지금도 매년 3억∼4억원을 기부하며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을 돕고 있다.
그는 한국 청년들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청년들에게 해외로 눈을 돌리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용기와 성실함만 있으면 세계 어디를 가든 성공할 수 있습니다.”
모두 7남매를 낳아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한 회장은 현재 교토의 저택에서 부인, 막내아들(31)과 함께 살고 있다.
도쿄=정승욱 특파원 jswook@segye.com
한창우 회장의 주요 약력
▲ 1931년 경남 삼천포에서 출생
▲ 1945년 밀항선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 도착
▲ 1952년 호세이 대학 경제학부 졸업
▲ 1957년 빠찡꼬업체 ㈜마루한 창업
▲ 1967년 교토에서 볼링장 사업 진출
▲ 1972년 60억엔 빚 떠안고 도산
▲ 1973년 빠찡꼬 사업 재개
▲ 1993년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결성
▲ 1995년 마루한, 도쿄 진출
▲ 2005년 연간 매출 1조3000억엔 돌파. 일본 30대 부자 진입
▲ 1931년 경남 삼천포에서 출생
▲ 1945년 밀항선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 도착
▲ 1952년 호세이 대학 경제학부 졸업
▲ 1957년 빠찡꼬업체 ㈜마루한 창업
▲ 1967년 교토에서 볼링장 사업 진출
▲ 1972년 60억엔 빚 떠안고 도산
▲ 1973년 빠찡꼬 사업 재개
▲ 1993년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결성
▲ 1995년 마루한, 도쿄 진출
▲ 2005년 연간 매출 1조3000억엔 돌파. 일본 30대 부자 진입
일본에만 있는 빠찡꼬는
빠찡꼬는 일본에서 동네 편의점처럼 보편화돼 있다. 전역에 2만여 점포가 있고, 기기는 500만대가량으로 추정된다. 연간 시장 규모는 35조엔 안팎으로, 일본 주택산업과 비슷한 수준이다. 일본 국민 1인당 연평균 17만엔을 소비한다는 비공식 통계도 있다.
빠찡꼬는 일본에서만 대중화된 오락이다. 이를 도박으로 규정해 수입을 금지하는 나라가 많다. 일본에서 성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도박’이라는 데 있다. 일본 당국은 주로 중산층 이하 사람들이 즐기고, 게임 액수도 크지 않다는 점에서 영업을 허가하고 있다.
일본 당국은 빠찡꼬가 본격적인 도박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감시한다. 영업 규정을 법으로 정해 원칙을 지키도록 한다. 승률과 경품도 일정 선을 넘지 못하도록 법규화돼 있다. 그러나 카지노는 규제하고 있다. 일본에서 현재 카지노는 한 곳도 없다. 빠찡꼬에 비해 거액을 쓰는 본격적인 도박이라는 판단에서다.
도쿄=정승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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