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가 주시하는 그린스펀의 입
영국 중앙은행인 영국은행의 메르빈 킹 총재는 최근 “각국의 전직 중앙은행 총재가 퇴임 후에는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린스펀 전 의장을 겨냥한 말이다. 그린스펀 전 의장이 퇴임 2년이 다가오면서 미국과 세계의 주요 경제 현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사례가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린스펀 전 의장은 지난해 1월 퇴임한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퇴임 직후 블룸버그통신과의 회견에서 “내가 공개적으로 견해를 밝히면 벤 버냉키 FRB 의장을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린스펀이 버냉키 의장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게 미 경제계의 평가다. 그는 자신의 발언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과대 평가돼 있다고 지적하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경제관을 밝히고 있다.
그린스펀 전 의장은 최근에 “미국 집값이 아직 바닥을 치지 않았다”고 말해 주택경기 침체 장기화를 예고했다. 그는 또 “달러화 약세가 세계 경제에 충격을 주고 있지 않다”고 진단했다. 그의 발언은 여전히 세계 경제를 진단하는 가늠자로 통하고 있다.
그가 지난 2월26일 사석에서 미국 경제가 2008년 초 침체기에 접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전해지자 뉴욕 증시의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시가 총액의 3.3%에 해당되는 416포인트가 떨어졌다. 이는 다우존스 지수가 2001년 9·11 테러사건으로 684포인트가 떨어진 이래 최대 규모의 폭락이었다.
그린스펀은 다만 FRB의 고유 영역인 통화정책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가하고 있다. 그는 퇴임 후에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경제 현황 진단을 내놓고 있으며, 주로 기관투자가들을 상대로 조언하고 있다. 그는 일주일에 평균 두 차례가량 경제 자문에 응하고 있으며, 그 때마다 15만달러 정도를 받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그린스펀은 또 미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캐나다, 유럽, 아시아 지역을 순회하면서 금융기관 등에 조언하고 경제특강을 하고 있다.
그린스펀의 특강은 비공개를 원칙으로 한다. 신문 방송 기자가 취재나 녹음, 촬영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참석자들을 통해 강연 내용이 상세하게 언론에 유출되고, 언론은 비중 있게 그의 발언을 전하고 있다. 그린스펀은 이런 과정에서 자신의 발언이 다소 와전되거나 과장·왜곡되면 부랴부랴 입장을 다시 밝히기도 한다.
미국에서 전직 FRB 의장의 행보와 관련된 관행은 없다. 로런스 메이어 전 FRB 의장은 그린스펀처럼 퇴임 이후 왕성하게 경제 기상캐스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린스펀의 전임자인 폴 볼커 전 의장은 퇴임 후 경제문제에 관해 일절 발언하지 않았다. 올해 81세인 그린스펀은 측근들에게 경제 컨설팅이나 진단 등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이 같은 일을 해왔는데, FRB 의장을 지냈다고 해서 입을 닫고 살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 그의 입장이라고 미국 언론들이 전했다. 그린스펀은 이제 공직에서 벗어났으니 개인적으로 돈좀 벌어야겠다는 얘기도 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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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스펀 FRB 의장 재임 시절인 2004년 의회에서 경제현안에 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정치인 압도하는 그린스펀의 사교술
그린스펀이 20년 가까이 미국 경제의 조타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학자로서 그의 능력 못지않게 뛰어난 사교술과 정치력이 한몫을 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린스펀은 결단력에서는 전임자 볼커 전의장에 미치지 못하고, 지적 능력에서는 후임자인 버냉키 의장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볼커 전 의장은 두 자릿수 실업률을 감수하면서 두 자릿수 물가 상승률을 잡는 결단을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버냉키 의장은 통화정책에 관한 한 당대 최고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린스펀은 사람을 다루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와 대화를 나눠본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들은 한결같이 그의 성품에 매료된다고 워싱턴포스트가 최근 보도했다. 그린스펀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실세인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 등과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 시절부터 각별한 친분을 유지해왔다. 그린스펀은 최근 출간된 자신의 회고록 ‘격동의 시대’에서 부시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그가 비판한 부시 대통령의 감세 정책을 추인한 장본인이 그린스펀 자신이다. 그린스펀은 체니 부통령이나 럼즈펠드 전 장관 등과 상이한 경제관을 갖고 있었지만, 그 같은 견해차를 뒤로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게 워싱턴포스트의 지적이다. 이는 책상물림으로 분류되는 버냉키 FRB 의장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영화배우 출신으로 경제 문외한인 로널드 레이건이 1980년 대통령에 출마했을 당시 참모들은 레이건의 경제 교사로 누구를 추천할지 고심하다 그린스펀을 선택했다. 그린스펀은 레이건 당시 대선 후보와의 첫 만남에서 무려 5시간 동안 유쾌한 대화를 나눴고, 두 사람은 막역한 친구가 됐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그로부터 7년 뒤인 1987년 볼커 전 의장의 후임으로 그린스펀을 FRB 의장으로 지명했다. 그후 그린스펀은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 조지 부시, 빌 클린턴 전대통령과 현 부시 대통령 등을 거치면서 2006년 1월31일까지 FRB 의장 자리를 굳게 지켰다.
그의 전임인 볼커 전 의장은 가급적 정치인이나 행정부 고위 관리들과 거리를 두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린스펀은 그 정반대이다. 공화당 출신인 그린스펀은 민주당의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아칸소주 리틀록으로 그를 만나러가는 파격을 서슴지 않았다. 그린스펀은 현 부시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는 체니 부통령 당선자 집으로 찾아가 몇 시간씩 경제 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눴고, 부시 대통령과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정례적으로 면담을 가졌다.
그린스펀과 그의 부인인 NBC방송 기자 안드레아 미첼은 워싱턴과 뉴욕 등에서 사교계의 꽃으로 통한다. 그린스펀은 1952년 첫 번째 결혼을 했다가 1년도 안 돼 이혼했고, 유명 방송인 바버라 월터스와 연인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97년 58세의 나이에 20년 연하인 당시 38세의 이혼녀 안드레아 미첼과 10년여 연애 끝에 결혼했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ku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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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스펀 전 FRB의장과 부인인 NBC방송기자 안드레아 미첼. |
美 “잘못된 통화정책 경제위기 불러” 비난 봇물
미국 경제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파동으로 휘청거리고, 주택시장이 침체기를 맞으면서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에 대한 비판론이 쏟아지고 있다.
그린스펀 전 의장은 최근 강연 등에서 장기적인 저금리 정책이 주택시장 거품의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현재 미국 주택시장이 거품 붕괴 상태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2005, 2006년까지는 미 주택시장이 현재와 같이 침체기에 진입할 것이라고는 인식하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그러면서 미국 주택 가격 하락률이 두 자릿수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3월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붕괴로 주택 차압이 급증하면서 비난의 화살이 그린스펀 전 의장을 향하고 있다. 미국 주택시장의 거품을 조장하고, 그 거품 붕괴에 따른 충격에 미국 경제가 흔들리는 원인이 그린스펀의 잘못된 통화정책 탓이라는 비판이다.
1990년대 닷컴 산업의 팽창과 붕괴의 이면에도 그린스펀이 자리 잡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린스펀이 1990년대에 생산성 향상으로 물가 상승 없이 경제가 순항할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리스펀은 1996년 9월 저금리 정책을 고수하기로 방향을 잡았고, 그 결과 은행 대출이 쉬워졌으며 돈이 주식시장에 몰리고, 수십억달러의 예금이 닷컴 기업의 환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환상이 깨지면서 미국 경제는 혼란기를 맞았다.
그린스펀이 자신의 고유 영역이던 통화정책 이외에 경제 전반과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언급해온 것이 과연 타당한지 논란도 일고 있다. 감세, 건강보험, 실업 정책 등은 FRB의 고유 영역이 아니다. 벤 버냉키 FRB 의장은 “중앙은행인 FRB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통화를 안정시키는 데 있다”면서 통화정책 이외의 문제에 대한 발언을 극도로 삼가고 있다.
학계도 그린스펀에 대한 비판에 가담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그린스펀 전 의장이 금리 인하를 통한 통화 유동성 확대에 주력함으로써 그 폐해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린스펀이 2001년 부시 대통령의 감세 정책을 지지했고, 그 여파로 정부의 재정적자가 확대됐다고 스티글리츠 교수는 지적했다. 미국의 진보적인 시사주간지 네이션 최신호는 ‘그린스펀의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 내 불평등을 심화시킨 그린스펀의 실책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kuk@segye.com
그린스펀 전 FRB 의장 약력
▲1926년 뉴욕 출생
▲1948년 뉴욕대 경제학과 졸업
▲1954년 컨설팅 회사 타운젠트 그린스펀사 설립
▲1968년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경제 자문관
▲1974∼1977년 포드 전 대통령 경제자문위 의장
▲1977년 컬럼비아대 경제학 박사
▲1981∼1983년 사회보장개혁위 의장
▲1987∼2006년 FRB 의장 5기 연임
▲현 그린스펀 어소시에이트 대표
▲1926년 뉴욕 출생
▲1948년 뉴욕대 경제학과 졸업
▲1954년 컨설팅 회사 타운젠트 그린스펀사 설립
▲1968년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경제 자문관
▲1974∼1977년 포드 전 대통령 경제자문위 의장
▲1977년 컬럼비아대 경제학 박사
▲1981∼1983년 사회보장개혁위 의장
▲1987∼2006년 FRB 의장 5기 연임
▲현 그린스펀 어소시에이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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