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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검은 피부에 드리운 하얀 가면 벗기는 아프리카 문인들

입력 : 2007-11-06 12:08:00 수정 : 2007-11-06 12: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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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호 아프리카문화연구소 소장
 아프리카에 첫발을 디딘 지 어언 10년이 흘렀다. 
 
 거창한 명분에 생면부지의 땅인 아프리카로 탈주를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일종의 피로감 탓이었던 것 같다. 90년대 중반의 한국 사회는 문화적 지형도가 매우 난삽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리얼리즘 문학의 이념적 토대는 심하게 흔들렸다. 거대담론이 무너진 자리에서는 억눌렸던 개인의 다양한 욕망들이 무한자유라는 이름의 지대를 영토화하고 있었다. 

 내가 느낀 문제의 피로감은 거대담론의 무너짐 때문이 아니었다. 정체가 불분명한 개인적 욕망의 출현 탓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 둘 모두가 한 점의 회의와 근거 없이 가장 이상적인 전범으로 삼고 있던 ‘유럽중심주의’ 때문이었다. 프란츠 파농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충격이 아직도 선연하다. 백인, 다시 말해 유럽인들이 만든 종교, 가치, 도덕, 형이상학 등이 유일무이한 진리로 통용되던 시대가 있었다. 이때 검은색의 실존을 통렬하게 외쳤던 이가 파농이다. 그는 자신의 검은 피부 위에 드리워진 하얀 가면을 감연히 걷어냈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수행하는 외국문학이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하는지를 통절하게 반성해야 했다. 기대와 설렘 속에서 시작된 아프리카 연구는, 그러나 결코 녹록지 않았다. ‘아프리카’라는 단일 이름으로는 껴안을 수 없는 수많은 다양성과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최남단 케이프타운으로 함대를 보낸 이후 400여년이 지났다. 유럽은 계몽과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아프리카를 식민화하고 착취했다. 그럼에도 아프리카의 정체성이 오늘날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은 이어진다. 서구의 근대성 혹은 근대화는 진정 만병통치약일까. 서구식 근대 혹은 근대화의 ‘바깥’은 정말 없는 것일까.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 3세계의 자생적 혹은 자발적 근대란 불가능한 것일까. 근대란 진정 ‘미완의 기획’일까.

 현대 아프리카 문학은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 이런저런 형식으로 파종되어 해답을 기다리는 시험지이다. 오늘날 우리가 아프리카 문학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서구식 모델을 모방하긴 했지만, ‘근대의 임무’를 일정 정도 완수한 한국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 그것은 아직 완벽하게 실현하지 못한 ‘미완의 근대’를 어떤 내용으로 채울 것인가이다. 

 서구식 근대는 완벽한 몰입의 대상도, 그렇다고 철저한 배격의 대상도 아니다. 냉정한 관찰과 준엄한 적용을 거쳐 ‘오늘 이 자리’의 삶과 역사를 가능케 한 물적 토대와 건강한 제휴를 이룩해내야 할 대상이다. 나는 아프리카 문학이 이 외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고독한 실험정신이 형형하게 살아 있는 한, 아프리카는 내게 ‘놋주발처럼 쨍쨍거리는 추억’의 과거가 아니다. ‘더러운 전통’의 뒤안길이나마 늠름하고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함께 걸어가야 할 영원한 맹목적 동반자이다.

이석호 아프리카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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