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잎’ ‘순아’ 등 히트곡 많아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울적해진다. 허전함을 달래려고 정다웠던 옛 추억을 애써 떠올려 보지만, 정작 그 빈 속을 채워줄 것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고독에 잠겨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위안을 삼았던 노래가 문득 생각난다. 1979년 발표돼 지금까지 애창되고 있는 ‘가을비 우산 속’.
이 곡은 빗속을 헤매며 이별의 아픔을 달랜다는 가사 내용과 가수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가을 분위기에 맞게 와닿아 여성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금도 가을비만 내리면 라디오에 이 노래는 어김없이 흘러나온다.
70, 80년대 밴드 ‘검은나비’를 이끌며 최고 인기를 누렸던 ‘가을비 우산 속’의 주인공 최헌(58)은 가을만 되면 유난히 바쁘다. 히트곡 때문에 방송 출연과 지방행사 초청이 줄을 잇고,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몇 차례의 전화통화 끝에 지난 17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어렵게 그를 만났다.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는 그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흰 머리카락 하나 없이 여전히 젊어 보였다.
테이블에 담뱃갑이 놓여 있기에 하루 얼마나 피우냐고 물었더니 그는 “평균 두 갑 정도”라며 얼른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미국에서 막 귀국한 친구하고 저녁 약속을 해놔 인터뷰 시간을 좀 줄여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사실 요즘 너무 바빠요. TV와 라디오 출연 요청이 많고 지방행사도 부쩍 늘었거든요. 1년 내내 이랬으면 집사람도 무척 좋아할 텐테….”
그는 “해마다 이때쯤이면 ‘가을비 우산 속’을 찾는 팬들을 쫓아다니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라며 “지방공연은 공항까지 가서 차를 갈아타는 시간도 아까워 무대 의상을 갈아입기 편하게 승용차로 다닌다”고 말했다.
간혹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집 밖을 나서지 않는다. 모처럼 집안 청소와 빨래를 하며 아내의 가사를 거든다. 기분 내킬 땐 집에서 낮술도 마실 정도로 주량이 센 편이다. 밖에서 마실때 2차는 절대 없다고. 평상시 건강은 아침마다 아내와 함께 한강 둔치로 나가 2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며 유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TV 건강프로그램 비타민에 출연해 체크한 게 고작인데, 그때 신체나이가 24살로 나오더군요. 그럼 건강한 거 아니겠어요?”
그는 무대에 서거나 사적인 일로 외출할 때도 남을 의식해 옷차림에 무척 신경을 쓰는 편이다. “이런 것들을 챙기는 연예인 마누라가 더 힘들다”며 너스레를 떤다.
“아내는 일정한 수입도 없고 아슬아슬해서 못살겠다고 죽는 소릴 하는데, 이상하게 돈이 떨어질 만하면 들어오고 또 들어오더군요.”
그의 성격은 고지식하면서도 개방적인 양면성을 지녔다. 한 번 폭발하면 누구도 막지 못하는 다혈질이다. 스스로 굶어 죽어도 남한테 손 못 벌리고 남이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카지노 게임 블랙잭은 밤을 새워 즐겨도 컴퓨터는 생판 모르는 ‘컴맹’에다, 은행에서 돈도 찾을 줄 모를 정도로 세상물정에 어둡다. 그저 있으면 쓰고 없으면 굶는 스타일이다.
“이 나이에 무슨 때다 싶으면 부조금을 5만원만 할 수 있습니까. 저는 죽어도 못합니다. 짜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거든요.”
그러면서 은근히 지난달 결혼한 딸(25)과 사위 자랑을 늘어놓는다. “제 딸이 이화여대 한국무용과를 나왔거든요. 지금 국제선 항공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좋은 짝을 만나 잘 살고 있어요. 둘째인 아들은 군 복무 중이에요.”
그는 최근 20년 동안 살던 서울 송파구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자양동 건국대 인근으로 이사해 아내와 단 둘이서 살고 있다고 전했다.
요즘 TV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그는 “처음에는 자식뻘의 젊은 후배 연예인들과 방송을 하니까 어색했는데,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다”며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를 던졌다.
“옛 히식스 멤버 주축으로 밴드를 결성해 마포에서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달에 50대 중반의 밴드를 선보여 기어코 과거의 명성을 되찾겠습니다.”
글 추영준, 사진 이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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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헌은 누구
가수 최헌은 1949년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경기고와 경성제대를 나와 미군통역관으로 일했고, 어머니(82)는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동국대 교수 등을 지냈다. 외아들인 그는 부모의 끔찍한 사랑과 귀여움을 받고 자랐어도 가정교육만큼은 엄격했다. 그러나 그는 대광고 3학년 때부터 부모 몰래 밴드를 만들어 음악에 빠져 살았다. 공부는 뒷전이었고 멤버끼리 ‘대학입학원서를 쓰면 서로 죽이기다’ 맹세까지 하고 음악을 했을 정도였다.
졸업할 때쯤 친구들은 대학에 들어갔고 다시 헤쳐 모여 음악을 계속하다가 1년 만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밴드 연습시간 외에는 입시공부에 전념해 친구들보다 1년 늦게 명지대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 때 국내 최고의 인기그룹인 ‘히식스(H6)의 멤버로 스카우트되는 행운이 따랐다. ‘초원의 사랑’과 ‘초원의 빛’이란 노래로 유명한 히식스에서 그는 리듬기타를 치며 당시 여대생의 주목을 받으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때만 해도 여성팬들과 대형버스 2대에 나눠 타고 야유회에 다닐 정도로 히식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낮에 차를 팔고 밤에는 나이트클럽으로 바뀌는 서울 명동의 미도파백화점 5층 ‘사운드 오브 미도파’에서 전속 밴드로 활동할 당시에는 쫓아다니는 극성 여자팬들을 피해 다니느라 맘고생도 많았다.
한창 인기 있을 때 기타리스트 김홍탁(현 서울재즈아카데미학원장) 등이 미국으로 건너가 팀이 해체되면서 그는 1974년 새로운 멤버 7명으로 ‘검은나비’를 결성했다. 최헌은 허스키하면서도 구수한 목소리로 김홍탁 작곡의 ‘당신은 몰라’를 발표해 당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2년 후 그는 새로운 그룹 ‘호랑나비’를 이끌며 전 국민이 따라 불렀던 ‘오동잎’을 탄생시켰다. 두 장의 앨범을 내고 밴드생활을 접은 그는 1977년 솔로로 데뷔해 ‘세월’이란 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어 2집 ‘어찌합니까’, 3집 ‘앵두’ ‘구름 나그네’, 4집 ‘가을비 우산속’ ‘순아’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 인기를 등에 업고 서울 종로 단성사 극장에서 최초의 리사이틀을 한 가수로도 기록을 남겼다. 1981년 중매결혼을 하고 연예인 생활이 싫어 서울 명동에서 오디오 대리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밴드는 그의 천직이었을까. 1984년 옛 친구들을 모아 다시 ‘불나비’를 조직해 미국 팝가수인 버티하긴스의 ‘카사블랑카’를 번안곡으로 발표했다. ‘검은나비’ ‘호랑나비’ ‘불나비’로 이어지는 팀이름의 나비시리즈 막을 내리고 ‘서울앙상블’이란 그룹을 만들었으나 나이트클럽에 레코드판으로 음악 틀어주는 DJ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활동할 무대를 잃어 10여 년간 방송을 쉬었다. 3년 전부터는 TV오락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추영준 기자 yjch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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