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방지 목적… 인권단체·학자 "인권침해” 비판 유럽이 거대한 감시 사회로 변하고 있다.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이탈리아 로마 등 유럽의 대도시 주민들은 자신의 일상 생활이 시내 곳곳에 설치된 폐쇄회로 TV(CCTV) 감시망에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다. 인권단체와 시민단체들은 “개인의 사생활이 자신도 모르게 기록·저장되는 것은 명백한 사생활 침해이자 인권침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유럽 각국 정부는 각종 범죄 예방과 테러 용의자 색출 등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이어서 CCTV를 둘러싼 논란도 뜨거워지고 있다.
베를린에 사는 회사원 토마스 뮐러(40)는 어느 날 시내에서 휴지를 버리기 위해 쓰레기통에 다가갔다 이상한 물체가 통 옆에 부착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자세히 살펴보니 다름 아닌 CCTV였다. 깜짝 놀란 뮐러는 이때부터 길거리를 걸을 때 가로수나 교통신호등, 건물 벽 등을 유심히 살펴보는 습성이 생겼다. 그리고 도심 곳곳에 너무도 많은 CCTV가 설치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유럽 전 지역이 감시카메라 천국으로 변모하고 있다.
런던과 베를린, 파리, 로마 등 유럽 각지의 대도시뿐 아니라 중소 도시도 예외가 아니다. 공항, 지하철역, 공원, 정부청사 등의 공공 건물은 물론 백화점과 은행, 광장, 번화가, 호텔, 교량 등 사람과 차량들이 몰리는 곳에는 어김없이 CCTV가 설치되어 있다. 심지어 쓰레기통과 공원의 나무에서도 CCTV는 돌아가고 있다.
이는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1903∼1950)이 1949년에 발표한 미래 소설 ‘1984년’에서 집안, 직장, 거리, 학교 등 어느 곳을 막론하고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빅 브라더’가 시민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전체주의 국가가 묘사된 것을 연상케 한다. 현대판 ‘오웰리안 사회’가 지금 유럽에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CCTV가 밀집해 있는 곳은 영국의 런던이다. 런던 시내 중심가를 걷는 보행자는 하루 동안 무려 350회 이상 CCTV에 그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영국 경찰 관계자는 “영국이 점차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감시 사회와 유사한 환경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2005년 7월 영국 경찰이 공개한 지하철역 폐쇄회로 TV(CCTV) 화면. 런던 지하철역 폭탄 테러범들이 테러 2주일 전에 범행장소인 킹스크로스역을 사전 답사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독일의 여건도 영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베를린과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뮌헨 등 대도시는 지난 5∼6년 동안 CCTV 설치 건수가 급증했다.
2001년 미국의 9·11 테러 사태 이후 테러 예방이 국제사회의 주요 현안으로 자리매김한 이후 세계 각국은 경쟁적으로 각종 테러 방지책을 마련하고 있다.
감시카메라 설치도 테러방지책의 일환이다. 이밖에 각국은 DNA 데이터베이스 확보, 전자메일 추적을 허용하는 법령 제정, 전자여권 발행 등 개인의 사생활 보호와 거리가 먼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에 혈안이 되어 있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내무장관은 여론과 정부 각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자메일 추적, 은행 계좌 추적 등 개인의 비밀스러운 영역을 파헤칠 수 있는 법안 통과를 시도하고 있다. 독일은 수년 전부터 경찰과 정보기관이 전과자와 테러 용의자들에 관한 광범위한 데이터베이스를 보유하고 있다. 내무부는 또 오는 11월1일부터 전자 칩에 지문이 저장돼 위조 불가능한 전자여권을 발급한다.
그러나 범죄 예방과 테러 용의자 색출을 용이하게 하는 이 같은 조치들은 각종 인권단체와 정치인, 학자들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고 있다. 페어 슈타인브뤽 재무장관은 은행 계좌 조사를 반대하고, 브리기테 치프리스 법무장관과 페터 샤르 연방정보보호위원회 위원장은 온라인 추적권 부여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7월 쾰른역 구내에서 발생할 뻔했던 폭탄 테러 미수 용의자가 CCTV를 통해 잡힌 것에 고무된 대테러전 선봉장 쇼이블레 내무장관은 감시체제 강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만약 독일에서 대규모 테러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때는 내무장관이 대테러 작전을 적극 추진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것”이라며 유비무환을 강조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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