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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지켜온 종가 화로 불씨

입력 : 2007-09-21 15:26:00 수정 : 2007-09-21 1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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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신씨 18대 종손 신호준씨 댁 “거 뭐 별거 있간디. 아침저녁으로 불씨가 있나 없나 챙기기만 허면 그만이여.”
전남 영광읍 입석리의 신씨 종가. 대나무 숲을 병풍 삼아 들어선 고즈넉한 고택에 영월 신씨 18대 종손 신호준(辛鎬俊·74)씨 내외가 살고 있다. 이곳이 여느 명문가와 다른 점은 바로 500여 년간 화로 불씨를 한 번도 꺼트리지 않고 지켜왔다는 사실. 투박한 놋쇠 화로는 이제 금이 가고 녹이 슬었지만, 지난 세월 종가의 전통과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 500년을 이어 온 신씨 화로의 불씨
“아무리 가스레인지로 음식을 만들어도 제상에 올리기 전에는 반드시 화롯불로 데워야 한당께.”
명절이 가까워 오자 신씨의 마음이 급해진다. 아궁이에 장작더미를 넣어 숯을 굽고 곳간채에 모셔둔 화로를 꺼낸다. 화로는 이 집안 진찬(進饌: 제상을 차리는 일)에서 없어서는 안 된다. 오랜만에 화로를 만지는 신씨의 손길에 힘이 더 들어간다.
“조상님덜 드실 건디, 식은 걸 올리면 안 되제. 이럴 때라도 불씨를 살려야 허지 않겄능가.”
그 옛날 부엌이며 사랑채에서 늘 불씨를 품고 있던 ‘생필품’ 화로는 이제 명절이나 문중 제사 때만 꺼내 쓰는 ‘유물’이 됐다. 20여년 전 전기와 가스보일러가 들어오면서 화롯불은 자연스럽게 꺼졌다. 조선 초기 영월 신씨 18대조가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500여년간 단 한 번도 꺼진 적 없던 화롯불이 제 명을 다한 것이다. 일제 치하나 6·25전쟁 같은 난리통에도 끄떡없던 불씨도 현대화 흐름마저 거스르진 못했다.
아쉽지 않을까. 신씨는 “아순 건 읎어. 시상이 변했응께 사능 것도 거기 맞춰야제”라며 부젓가락으로 허허하게 숯을 뒤집는다.
신씨 종가에 있는 화로는 모두 5개. 이 중 하나만 대를 이어 내려온 거고, 나머지는 광복 이후 새로 만든 것이다. 수백 년 세월을 버텨온 가보는 군데군데 조각이 떨어져 나가 사랑채에 보관하고, 차례나 제사에는 새것을 쓴다.
# 500년을 이어 갈 신씨 화로의 정신
“시집와서 화롯불 챙기는 것부터 배웠당께. 꺼질 일은 없지만서도 신경 쓰이는 건 당연하지.”
신씨와 결혼해 47년째 종가를 지키는 종부 안예순(73)씨에게도 화로는 애틋한 물건이다. 주변에선 “종갓집 큰며느리 자리가 얼마나 힘들겠느냐”고 말하지만, 정작 본인은 어른들 모시는 일보다 화롯불 지키는 게 더 힘들었단다. 500년을 이어온 불씨가 자기 탓에 꺼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밤사이 화로에 숯을 잔뜩 쟁여 놓은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새벽에 부엌에 나간 적도 부지기수.
이렇게 맏며느리를 노심초사하게 만든 화로는 늘 종가를 훈훈하게 밝혀줬다. 여름철엔 음식을 데우는 데 쓰이고, 겨울엔 문풍지를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을 녹이는 데 사용됐다. 고구마를 구워 먹거나 곰방대 불을 붙이는 데도 화로가 긴요했다. 변함없이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 이게 바로 신씨 화로의 정신 아닐까.
화로구이 전문점으로 유명한 ‘신씨화로’도 바로 이 종택에서 불씨와 브랜드를 빌려갔다. 신씨는 그러라고 했다. 대신 수익의 일정 부분을 사회공헌에 쓰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처음에 반대하던 종친들도 신씨의 뜻을 따랐다. 그는 “화로 불씨는 꺼졌지만, 전통이 이렇게라도 이어지면 좋지 않겄소”라며 웃었다.
영광=글 이성대, 사진 김창길 기자, 그래픽 윤대영 기자
karisn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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