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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걸어다녔을까?

입력 : 2007-09-07 11:03:00 수정 : 2007-09-07 11: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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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걷고 뛴 열 갈래 길에서 로드무비를 보는 듯한 감동이 밀려온다
■역사, 길을 품다-풍찬노숙에 그려진 조선의 삶과 고뇌/최기숙 외 9인 지음/글항아리/1만6000원
“조선시대를 설명하는 추상적인 이론을 제시하는 대신, 실제 그들의 삶의 이모저모를 구체적인 인물이나 사건, 대상을 중심으로 소개함으로써 조선의 실체를 경험하게 하자는 것이 이 책의 취지이자 바람이다. …… 어느 곳이 머물 만한 곳이며 무엇이 가치 있는지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역사와 미래를 잇는 시간의 이정표가 창조된다. 자기만의 인생길을 찾는 모든 분들께,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빛으로 그 길을 터준 옛사람들께 이 글을 바친다.”(머리말 중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나?=하늘이 흐리면 덩치가 큰 몇몇 별밖에 보이지 않는다. 설령 다른 별들이 보이더라도 희미하다. 하지만 하늘에 잡티가 없는 티베트 같은 곳에 가면 모든 별들이 그 속까지 다 투명하게 비치는 것처럼 반짝거린다. ‘역사, 길을 품다’는 조선시대를 그런 식으로 조명하고자 했다.
책은 열 갈래의 길을 통해, 조선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구체적인 인생행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잘 살고 있는데 청천벽력처럼 유배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유배길), 적이 자꾸 국경을 침범해 도대체 어떤 놈들인지 살펴보러 떠나야 했을 때(첩보길), 억울하고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어 집단으로 항명을 할 때(상소길), 단짝과도 같은 아내가 죽어서 그 어찌할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을 견뎌야 할 때(장례길), 평생을 괴롭힌 병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급적 산길을 피하고 평지와 물길을 이용해 쉴 곳을 찾아 떠날 때(요양길) 길 위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롱테이크로 잡았다.
고담준론의 조선도 아니고, 처참하고 비참한 조선도 아니며,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거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역사화된 조선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손짓 하나, 몸짓 하나에 담겨있는 의미를 포착하고자 했다. 길을 걸어가면서 멍하게 그들의 머릿속을 맴돌았던 생각,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때 머릿속을 채운 걱정거리, 부탁을 거절당했을 때의 굴욕감과 대안을 찾기 위한 부산함,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날것 그대로의 공포를 살려냈다. 그림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일상적인 삶을 그린 풍속화나 풍경화도 아니고, 개념이나 담론의 구조를 보여주는 추상화도 아니며, 펜으로 하나하나 따라가면서 느낌들을 살려낸 극사실화에 가깝다.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많은 경우 일선 실무자들이라는 점이다. 몸이 축날 정도로 일을 해서 겨우 휴가길을 떠날 수 있었던 하급관리의 사례나, 수령의 명령에 따라 국경을 건너 거칠고 무서운 야행을 감행해야 했던 후창군의 장교들과 행정관속들이 그렇다. 양반들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대부분 권력자라기보다는 과중한 업무에 짓눌린 고을 수령이나, 인조반정 이후 서인세력에 밀려 서원을 빼앗을 위기에 처한 안동사림의 이야기가 나온다. 요즘 말로 하면 대한민국 1%의 정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떠받치고 있는 중산층의 삶과 고뇌를 조선시대에서 찾은 것이다.
어떻게 말하고 있나?=이 책은 길과 역사의 결합이다. 길을 테마로 해서 조선시대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재구성한 것이기도 하지만, 길의 굴곡과 험한 모습, 시작과 끝이 있는 길의 구조적 속성, 낯선 사람들과 마주치듯이 우연적 사건들이 개입해 들어오는 삶을 보여주는 등 길의 속성을 잘 살리고자 했다.
첫째,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은 특정 개인이 남긴 일기나 일지를 바탕으로 1~2달간의 삶을 재구성한 것이다. 첩보길, 휴가길, 상소길, 마중길, 과거길, 암행어사길이 그러하다. 일기이기 때문에 매우 솔직하고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매일매일의 기록이기 때문에 자세하고 상세하다. 외부의 여러 사건과 정황들이 한 사람의 시선에서 정리되고 평가되고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특징도 있다.
둘째, 길을 떠나서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의 일정 혹은 집을 나서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일정을 다루고 있다. 왜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가 대개 첫 부분에 등장하며, 중간 부분은 길 위에서 고생스러웠던 일, 목적지에 빨리 닿기 위해 했던 노력들, 조선의 풍속과 풍물, 자연이 그려지며, 여행에서 느끼게 마련인 여러 가지 삶에 대한 단상과 낯섦에 대한 토로 등이 나온다.
셋째, 철저한 사료비평의 바탕 위에서 일기 속에 그려진 조선인들의 삶이 객관적으로 조망 된다. 일기의 기록은 한 개인의 여과되지 않은 슬픔과 분노, 소소한 느낌들이 모두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라고 해서 일기까지 에헴! 하면서 격식을 차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자들은 그런 주관적 감정들을 그대로 본문 속에 살려내면서도 그 사람이 처한 정치적 상황, 신분적 위치, 개인적 연륜까지 따져가면서 왜 그런 말이 나오는지를 짚어주고 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암행어사길>에서 주인공 박내겸이 어명을 받고 바로 길을 떠나야 했으나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송별연을 갖고 떠났다거나, 그래서 그 기간이 일지에서 삭제돼 있다거나 하는 부분을 필자는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즉, 이 책은 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일기이기 때문에 자칫 역사가 협소하게 초점화되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썼다.
누가 말하고 있나?=요즘 학자들의 공저서의 경우 학술대회 결과물을 묶어낸 경우가 대부분이고, 팀의 공부내용을 모아 낸 경우가 가끔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서로를 잘 모른다. 하지만 해당 주제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문가들이 기획의도에 공감하며 상당한 공을 들여 개개의 글을 작성했다.
이 책의 필자들은 학계의 주목받는 중진 소장학자들이다. 모두 맡은 분야에서 최고의 연구성과를 내는 학자들이 글을 썼다. ‘첩보길’을 쓴 강석화 경인교대 교수는 조선시대 첩보활동에 대해서는 국내 유일한 전문가이고, ‘상소길’을 작성한 설석규 국학진흥원 연구원은 안동 민가에 떠돌아다니는 문중일기를 어렵사리 찾아내 아직 학계에 보고조차 되지 않은 내용을 흥미진진하게 대중화하여 풀어냈다. ‘마중길’을 쓴 이선희 국민대 연구교수는 가장 젊은 소장 연구자로 지방수령의 일상생활로 박사논문을 제출해서 그 참신함과 개척적인 도전정신으로 학계의 시선을 끌고 있다. ‘휴가길’을 쓴 이지양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연구원은 벽사 이우성 선생의 실시학사(實是學舍) 멤버로 지난 10여년 참여하면서 수많은 고전을 섭렵한 박람강기로 유명한 여성 한문학자이다. 그는 ‘매천야록’ 같은 고전번역을 주도해낸 바 있다. 그리고 ‘장례길’을 맡은 김종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계간지 ‘문헌과해석’ 팀의 일원으로 ‘문헌과해석’의 산문정신을 대표하는 낙수여적을 집필하는 등 정민-안대회의 계보를 잇는 뛰어난 글쓰기와 감성의 소유자로 그 실력을 이번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 외에 차미희 이화여대 교수와 오수창 한림대 교수는 각각 조선시대 과거제도, 조선시대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저술도 낸 중진 학자들이다. ‘요양길’을 담당한 강민구 경북대 교수는 조선시대의 과학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송남잡지’ 같은 고전을 최근 역주했으며(미출간), 이런 열정과 역량을 살려 ‘요양길’에서도 한강 정구가 몸에 맞은 침의 종류, 한약의 명칭과 효과 같은 것을 세밀하게 복원해내었다. ‘유배길’을 쓴 최기숙 연세대 교수는 조선시대의 민담이나 귀신이야기 등으로 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이를 바탕으로 최근에는 ‘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마치 잘 쓰인 평전의 클라이맥스 대목을 보는 듯한, 탱탱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글쓰기로 ‘유배길’의 주인공인 조희룡의 내면을 담아냈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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