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국 학생에게 조기유학은 너무 흔한 선택 중 하나여서 필수 교육과정의 일부처럼 여겨질 정도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부작용이 걱정돼 선뜻 조기유학을 결정하지는 못하지만 다녀오면 자녀가 최소한 영어실력 하나는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같은 생각은 고정관념에 불과하다고 나선 이가 있다. 바로 다국적기업 제스프리 한국지사에서 일하는 임규남 상무다.
그는 해외유학 경험이 전혀 없지만 ‘3000시간 공부법’으로 유학파 못지않은 영어실력을 갖춘 실력파다.
대우전자를 다니다 외환위기 때 실직한 임 상무는 세일즈 능력을 인정받아 외국인 회사에 입사했지만 외국인 사장의 인사말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영어 실력이 형편없었다. 그는 우연히 동시통역사로부터 ‘인간이 특정한 언어를 익히기 위해선 최소한 3000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이론을 듣고는
3000칸짜리 표를 만들어 1시간 공부할 때마다 빈칸을 채우는 식으로 공부해 지금은 해외유학파 못지않은 영어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최근 ‘해외연수 조기유학 독인가 약인가’라는 책까지 펴내며 조기유학 열풍에 일침을 가한 그가 말하는 조기유학의 허와 실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영어는 시간과의 싸움”
#사례 1
직장인 김모(42)씨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아들의 영어 실력이 생각처럼 늘지 않아 고민에 빠졌다. 4년 전 수천만원을 들여 2년이나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보냈지만 현재 아들의 영어실력은 한국에서 영어를 공부한 친구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귀국한 직후에는 영어실력이 괜찮은 듯 보였다. 하지만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에서의 경험을 잊었는지 지금은 영어단어 몇 개와 간단한 문장 정도를 조합하는 수준으로 오히려 실력이 떨어졌다.
김씨는 “어렸을 때 연수했으니 남들보다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며 “유학을 다시 보낸다고 해도 영어실력을 제대로 쌓을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임 상무는 “영어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영어를 학습하기에 좋은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투자하는 시간이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어학연수를 갔다고 해도 부모나 한국인 친구와 함께 있으면서 한국어로 대화하는 시간이 많다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한국에서 공부하면서 영어에 노출되는 시간을 늘리고, 그 시간 동안 집중력을 발휘해 공부하는 편이 더 낫다.
◆“영어를 배울 목적이라면 조기유학 보내지 마라”
#사례 2
주부 임모(40)씨는 요즘 초등학교 4학년인 딸을 유학보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자녀교육을 위해 경기도에서 살던 큰 집에서 강남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지만 막상 강남에 와 보니 조기유학을 떠나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최고라는 강남에 왔으니 이 정도면 되겠지’라며 위안을 해보지만 방학만 지나면 친구들이 사라진다는 아이의 말을 들을 때면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처럼 자녀를 조기유학 보낼지 고민하는 학부모들은 나날이 늘고 있지만 임 상무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영어를 배울 목적이라면 가지 말라”고 충고한다.
유학의 목적이 영어를 배우기 위한 것인데, 영어교육이 목적이라면 가지 말라는 말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임 상무는 “정확하게 말하면 영어만 배울 목적이라면 가지 말라는 뜻”이라며 “자녀를 외국에서 공부시킨 뒤 그곳에서 아예 살게 할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비싼 돈을 들여서 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기유학이 효과를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어실력을 쌓는 데 드는 비용과 수고까지 계산하면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 임 상무의 조언이다.
◆“한국은 영어배우기 좋은 나라”
막상 조기유학을 보내지 않기로 했지만 학부모들의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임 상무는 한국이야말로 영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가장 많은 나라라며 네 가지 이유를 소개했다.
우선 한국은 CNN과 BBC 등 영어뉴스와 시트콤, 영화, 만화영화 등 본인이 원한다면 일년 내내 영어와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는 것이다.
영어학원은 지방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으며 한국만큼 수많은 영어학습교재와 영자신문 등이 있는 나라도 드물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로는 한국은 영어와 한국어의 표현 전환을 위한 최적의 학습장소이다. 유학을 보낸다고 해도 사회생활은 한국에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적인 상황을 영어로 표현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인데, 이는 영어권 국가에 유학을 간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셋째, 영어학습에 거의 돈이 들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
미국의 학교나 학원에서는 강사가 한 번 말하고 지나치는 표현을 한국에서는 녹음기 등을 통해 수십 번 반복학습을 할 수 있다.
외국에서도 반복학습이 가능하다고 반박할 수는 있지만 외국에서 그렇게 공부할 생각이라면 유학을 갈 필요가 더욱 없다.
마지막 이유는 가족과 이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가족 간의 사랑이 뒷받침되어야 자녀가 안정적으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유학보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조풍연 기자 jay24@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