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적 리얼리즘이란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환상이 뒤엉켜 있지만 결과적으로 현실을 더 강력하게 웅변하는 마르케스의 독특한 작풍이다. 보르헤스에서 출발해 마르케스가 빼어난 작품을 통해 정착시킨 이러한 작법은 이후 남미작가들은 물론 한국의 작가들에게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마르케스의 이러한 작법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그의 자서전을 일별하면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콜롬비아의 가난한 가정에서 11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마르케스는 법대를 나와 출세하기를 갈망한 부친의 뜻을 어기고 보고타의 법과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했다. 이후 그는 카리브해변의 바랑키야라는 도시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소설을 쓰고 신문을 만드는 삶을 살아갔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준 사건은, 어머니가 나타나 예전 성장기에 그가 살았던 외갓집을 팔러가자고 권유해 따라나선 경험이었다. 이 단순한 여행을 통해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 주변의 사람들과 환경을, 거미가 꽁무니에서 쉼없이 줄을 풀어내듯 줄줄이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마치 ‘백년의 고독’의 현실 버전을 다시 창작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과연 이 세기의 명작이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지, 아니면 작가 자신이 실제로 겪었던 혹은 겪었다고 착각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결과물인지 헷갈릴 정도다.
옮긴이 조구호씨(배제대 스페인어·중남미학과 교수)는 자서전에 풀어내고 있는 마르케스의 어린시절 경험들을 두고 “혹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백년의 고독’을 쓰기 위해 착상한 것을 과거에 겪은 실제 사건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후기에 언급하고 있다. 예컨대 ‘백년의 고독’에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열일곱 아들의 다양한 삶과 죽음을 접하다 보면 독자들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지만, 자서전을 읽어보면 이 또한 마르케스가 유년 시절 외가에서 겪은 실제 사건을 변형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자서전에는 유년시절의 체험뿐 아니라 카리브해변과 콜롬비아 수도가 위치한 여러 고원지대를 전전하면서 겪은 생생한 이야기, 다양한 인간 군상과의 조우, 음악을 비롯한 예술에 대한 열정, 술, 댄스파티, 섹스 등에 얽힌 이야기를 솔직하게 고백해 놓음으로써 소설 못지않은 흥미를 돋운다. 학생으로서, 기자와 작가로서, 콜롬비아 현대사에 중요한 획은 그은 역사적 사건들을 고스란히 복원하여 독자들에게 역사적인 현장과 가까이 마주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점도 돋보인다. 마르케스는 콜롬비아군의 한국전쟁 참전 전후 상황에 관해서도 상당부분 할애했다.
마르케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작가들이 일반 독자들과는 달리 흥미를 느낄 만한 실용적인 대목도 눈에 많이 띈다. 작가 초년 시절, 마르케스는 존경하는 노선배에게 초고를 보여주었는데 그는 열심히 읽고 나서 몇 군데 지적한 뒤, 마르케스가 이후 두고두고 지킨 충고 한마디를 보탰다.
“자네의 겸양을 고맙게 생각하는 의미에서 내 자네에게 충고 한마디 하겠네. 현재 쓰고 있는 초고는 절대 남에게 보여 주지 말게.”(174쪽)
작품을 집필하는 과정의 고통과 답답함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도 없고 도움을 받아서도 안 된다는, 오로지 작가만의 숙명적인 몫이라는 뼈저린 충고로 들린다. 당시나 지금이나 엄지로만 타이핑을 한다는 마르케스는 자서전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
조용호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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