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대사 연대는 상향 날조가 일반적이다. 일본의 권위 있는 역사사전에도 “닌토쿠천황은 5세기 전반 왜의 대왕이다”(가도가와 제2판 ‘일본사사전’ 1976)고 쓰고 있다. 게이오대 가사하라 히데히코(笠原英彦·일본정치사) 교수도 연대에 대해 다음같이 지적했다.
“닌토쿠천황은 ‘송서왜국전’(宋書倭國傳)에 기록된 왜의 5왕 중 ‘찬’(讚) 또는 ‘진’(珍)으로 추정된다. 능묘는 오사카부 사카이시의 다이센고분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를 의문시하는 견해도 계속 나오고 있다. 능묘는 전장 486m로 일본 최대의 전방후원분이다.”(‘역대천황총람’ 2001)
◇닌토쿠왕릉의 도굴품인 5세기경 백제 환두 대도. ‘큰칼’의 환두 속에 용머리가 보인다. 미국 보스턴박물관 소장(왼쪽), 12세기에 후지와라노 사타이에가 붓글씨로 쓴 ‘난파진가’.(‘고금집’의 필사본·일본 국보). |
중국 ‘송서’ 등을 보면 왜 5왕 중 ‘찬’의 지배시대인 425년(元嘉2년) 왜 사신이 조공차 남조(중국)로 건너간 기사가 보인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에 닌토쿠왕 서거를 399년으로 쓴 것은 잘못이다. 닌토쿠왕이 ‘진’이라면 더욱 후대에 속한다.
도쿄대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사학) 교수는 “동아시아 고대사에 관해 여러 가지 새로운 견해를 발표한 마에다 마사노리(前田直典)는 ‘진왕’이 닌토쿠천황이라고 제시했다”(‘日本の歷史’ 1983)고 지적했다. 이는 닌토쿠왕이 5세기 이후의 왜왕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필자는 지난 1월 23년 만에 다시 사카이시의 ‘닌토쿠왕릉’을 답사하고 왕인 사당인 ‘사이린지’(西琳寺)를 참배했다. 닌토쿠왕과 왕인은 친밀한 연분이 있다. 왕인은 구다라스의 오진왕(백제 곤지왕자) 초청을 받고 왜 왕실로 건너가 왕자들에게 글(‘천자문’ 등 한문)을 가르치는 스승이 됐다.
이때 가르친 제4왕자(오사자키 노미코토)가 훗날의 닌토쿠왕이다. 왕인이 제자인 닌토쿠왕을 왕위에 천거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 일본 최초의 와카(和歌)인 ‘난파진가’(難波津歌)이다.
8∼9세기 때의 일본 고문헌을 조사해보면 왕인은 왜나라에서 ‘글월의 조상님(文祖)’으로 숭앙됐으며(‘懷風藻’ 751,‘靈異記’ 822 등), 이른바 ‘와카’라는 일본 전통의 정형시도 처음 지었다. 그의 와카는 ‘난파진가’ 또는 ‘매화송’(梅花頌)으로 불린다. 한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겨울잠 자고 지금을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
이 시가가 우리 삼국시대의 ‘이두’와 ‘향찰’ 표기를 원용했다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왕인은 일본 선주민 말에다 한자어를 맞추어 소리(音)와 새김(訓)을 구사하는 일본 최초의 ‘만요가나’(萬葉假名) 표현법을 만들어 ‘난파진가’를 읊었다. 신라 이두 전공학자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1822∼1944) 경성제국대(일제강점기의 서울대) 교수는 “일본 만요가나는 이두의 영향을 받았다”(‘鄕歌及び吏讀の硏究’ 1929)고 밝혔다.
◇닌토쿠왕릉의 도굴품인 5세기경 신라 마탁과 삼환령(미국 보스턴박물관 소장) |
또한 도쿄의 왕립대인 가쿠슈인대 국문학과 오노 스스무(大野晋) 교수도 “향가(鄕歌)의 문자사용법은 일본 만요시가(萬葉詩歌) 문자사용법과 똑같다”(‘日本語の世界’ 1980)고 지적했다. “일본어는 남방계 언어(인도네시아 등 일본 선주민들의 언어)의 기반 위에 조선 반도로부터 알타이계 언어의 유입으로 성립됐다”(‘日本語の起源’ 1957)고 오노 교수는 강조했다.
왕인의 ‘난파진가’는 약 400년 만인 905년 다이코왕(897∼930 재위)의 왕명에 의해 기노 쓰라유키(紀貫之·872∼945)가 편찬한 ‘고금집’(‘古今集’)에 실렸다. 일본 국보인 ‘고금집’ 필사본(伊達本, 다테본)에 ‘난파진가’가 나온다. 이 필사본은 12세기경 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1161∼1241)가 붓글씨로 썼고, 1938년 7월4일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왕인이 와카를 지은 동기도 기록에 나온다.
오진왕이 승하하자 태자였던 제5왕자 ‘우지노와키이라쓰코’는 제4왕자 오사자키노미코토(닌토쿠왕)에게 즉위할 것을 끈질기게 권유했다. 그러는 동안 왕좌는 3년간 비어 있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왕인은 제4왕자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하면서 ‘난파진가’를 읊었다. 결국 제4왕자가 닌토쿠왕으로 즉위했다. 왕인은 당시 왕실의 정무장관(西文首)이었다.
◇닌토쿠왕릉 가는 길. 오사카의 ‘덴노지역’에서 ‘JR간와선’ 전철을 타고 ‘모즈역’에서 내리면 도보 약 10분 거리에 위치한다. |
시에 나오는 ‘난파진’은 지금의 오사카 항구다. 닌토쿠왕은 등극 후 왕인의 뜻대로 난파진으로 천도했다. 난파진의 고진궁(高津宮·다카쓰노미야)이다. 나라(奈良) 땅에 있던 아버지 오진왕의 풍명궁(豊明宮·도요아키라노미야)을 떠나 백제인들의 새 터전 난파진으로 천도한 셈이다.
왕인이 시에서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라고 했듯이 닌토쿠왕은 난파진에 새로 고진궁을 짓고 백제인 정복왕가의 눈부신 꽃을 피웠다. 그는 특히 농업 진흥에 힘써 저수지 ‘교산못’과 ‘만다 제방’ 같은 방죽을 쌓게 하는 등 개척 사업에 앞장섰다.
왜나라 정복왕인 오진왕과 닌토쿠왕이 백제인이란 것은 와세다대 미즈노 유(1918∼2000) 교수 등 저명 사학자들이 밝힌 바 있다. ‘고금집’의 저자 기노 쓰라유키는 왕인의 ‘난파진가’를 가리켜 “아버지의 노래(父歌)이며, 천황 어대에 최초로 읊은 노래”라고 찬양했다. 기노 쓰라유키도 백제인(‘신찬성씨록’ 815)이다. 일본의 국문학자들은 애써 그 점을 밝히려 하지 않는다. 필자는 그 점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그들이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우리가 밝히면 된다. 그래서 필자는 왕인의 문학적 발자취를 국내 처음으로 밝힌 바 있다.
기노 쓰라유키에게 왕명으로 ‘고금집’을 편찬시킨 제60대 다이코왕(897∼930 재위)은 백제인 명재상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845∼903)도 총애해 좌·우대신으로 삼고 ‘유취국사’(類聚國史 892)와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901) 등 국사책을 직접 편찬케 했다.
닌토쿠왕릉 도굴 사건은 특히 우리가 주목할 일이다. 도쿄대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교수는 “1872년 9월 닌토쿠릉의 정면 중간 부위의 흙이 무너져 석관이 노출됐다. 호우 때문이었으리라(중략). 미국 보스턴박물관에는 1908년부터 닌토쿠천황릉에서 도굴된 유물들이 있다”(‘日本の歷史’ 중앙공론사 1983)고 지적했다.
필자는 지난 2월12일 미국 보스턴박물관을 찾아갔다. 박물관 발행 ‘소장품집’에 ‘백제 큰칼’의 환두식(環頭式) 칼자루와 흡사한 유물이 원색사진과 함께 나와 있다. 닌토쿠왕릉의 도굴품이다.
이 칼자루는 1971년 7월 공주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환두식 백제 큰칼과 유사하다. 닌토쿠왕이 아버지 오진왕과 더불어 백제인이라는 것이 간접 입증된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미쓰오카 다다나리(滿岡忠成) 교수는 “환두식 칼자루의 둥근 고리 안에 용과 봉황 등의 장식을 갖추고 있다.
이런 환두대도를 일본에서 한국검(高麗劍·고마쓰루기)이라고 부른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그 양식은 조선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근래 한국에서 발굴된 유품에서 이런 종류의 칼자루를 풍부하게 볼 수 있다는 것도 이를 입증한다”(‘日本工藝史’)고 밝혔다.
보스턴박물관의 소장품에는 닌토쿠왕릉 도굴품으로서 역시 5세기 신라의 말장식품인 마탁(馬鐸)과 삼환령(三環鈴)도 있다.
또한 박물관의 일본관(2층, 일본불교미술)에는 백제 제27대 위덕왕의 신상(神像)인 ‘대위덕명왕좌상’(大威德明王坐像, 11세기, 연재 15회 참조)과 위덕왕의 신상 그림인 ‘대위덕명왕상’(연재 16회 참조)이 전시돼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hens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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