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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예비성직자이자 ''시인''이었다

입력 : 2007-02-16 17:25:00 수정 : 2007-02-16 17: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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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빛 꽃봉오리가 피더니/ 온통 푸른 빛 도는 보랏빛이네/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계곡의 백합 풀 위에 누웠네// 종달새 짙푸른 하늘에서 노래하며/ 구름보다 더 높이 날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이팅게일/ 숲 속에서 아이들에게 노래 불러주었네// 꽃이여, 아 나의 그루지아여!/ 평화가 내 조국에 넘치게 하라!/ 친구들이여 노력해/ 빛내라 조국을!”
소련의 초기 지도자 스탈린의 시(詩) ‘아침’이다. 믿어지는가. 히틀러와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독재자, 러시아 혁명을 ‘반혁명’으로 뒤집은 세기의 무단아 스탈린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썼다니…….
사실 스탈린은 마르크스를 알고, 혁명가가 되기 이전엔 시인이었다. 그것도 성직자를 꿈꾸던 신학생 시인이었다. 그의 성장 배경과 환경을 보면 기가차다. 한 혁명가, 독재자가 어떻게 태어나고 성장하는지 전범(全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878년 12월 6일 그루지야의 소도시 고리에서 스탈린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삶의 낙오자이자 비참한 주정뱅이였다.
스탈린의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 아버지 베사리온은 구두장이였다. 성질이 불 같았던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구둣방이 실패하여 문을 닫자, 술을 퍼마시고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비참한 가장이었다.
스탈린은 언젠가 자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또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곤 자기가 아버지에게 대들며 칼을 던졌다고 딸 스베틀라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칼은 아버지를 빗나갔다. 잔뜩 화가 난 베사리온이 이오시프에게 달려들었으나 동작이 느려 그를 잡지 못했다. 이오시프는 그 길로 달아나 아버지의 화가 제풀에 풀릴 때까지 이웃에 숨어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신앙심 깊고 영리한 이오시프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열 살 때 종교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구두공장에 취직한 아버지가 어린 스탈린을 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으나, 어머니는 지역 유지들에게 호소해 아들을 구두공장에서 되찾아왔다. 어머니 덕에 스탈린은 성직자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한 스탈린은 16살이던 1894년 그루지야 수도의 티플리스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성직자 교육뿐만 아니라 문학과 역사,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다. 스탈린은 이미 1학년 때 신문에 시를 발표해 그루지야 문인들의 격찬을 받았다. 그가 다룬 주제는 자연과 대지, 애국심이었다.
그루지야 문학 세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시인 스탈린은 마르크스, 플레하노프, 레닌 등의 책을 읽으면서 종교에 대한 신념과 시에 대한 열정을 버렸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을 발견했다. 그리고 신학교 졸업을 앞둔 1899년 미련 없이 성직자의 길을 뒤로 하고 혁명가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는 평생 맹렬하게 공부한 사람이었다. 역사적인 인물, 특히 이반 뇌제와 표트르 대제에 관한 책들은 수없이 읽었으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주석을 달아 가며 꼼꼼히 읽었다. 감옥에서도 유형지에서도 심지어 내전 때 전장에서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내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레닌의 ‘국가와 혁명’ 개정판을 가지고 다녔다. 이 책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의 공산당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그 내용이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책 가장자리에 메모를 하면서 그는 이렇게 자문했다. “당이 프롤레타리아의 의지에 반해 권력을 잡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프롤레타리아는 전위 없이는, 유일한 (당인) 당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이를 수 없다.”
그의 지적 관심은 문학, 역사, 경제, 과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군사 전략에 관한 공부를 시작해 얼마 안 가 군사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었다. 주로 사회주의 이념을 다룬 저작을 써 온 스탈린이 1950년에 러시아 민족의 언어를 다룬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문제’를 발표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의 경쟁자들은 인정하기 싫어했지만 스탈린은 글을 유려하고 논리적이고 사려 깊게 쓰는 지식인이었다.
1899년 혁명 운동에 뛰어든 스탈린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는 활동에 전념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조직하는 일에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는 스스로 두각을 나타냈다. 비밀 지하 활동과 비합법적인 선전,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를 강조하는 스탈린은 영락없는 미래의 볼셰비키였다(볼셰비키 파는 1903년 2차 당 대회에서 성립된다). 1902년 4월 처음 체포된 이후로 그는 몇 번의 체포와 유형, 탈출을 반복했다. 1905년 혁명이 일어날 무렵에 이미 스탈린은 그루지야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그는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논쟁하고, 조직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1912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된 스탈린은 레닌의 요청으로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가 ‘프라우다’를 창간하고 편집인을 맡았다. 마침내 볼셰비키 핵심 지도부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스탈린’이란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철(stal)’을 뜻하는 러시아 이름이었다. 수도에서 정력적으로 볼셰비키 활동을 이끌던 그는 1913년 2월 마지막으로 체포돼 시베리아 북동쪽 끝 투루한스크로 유형을 떠났다. 그는 제정이 무너진 1917년에야 귀환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소탈하고 겸손한 혁명가였다. 그는 지적으로 탁월한 다른 혁명가들처럼 거만하지 않은 동지였으며, 순박한 태도로 경계심을 허물어뜨리는 친근한 동료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결코 속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는 신중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어떤 분위기라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그는 한마디로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냉정하고 과묵한 그는 자신에 대한 경쟁자의 신랄한 비판 앞에서 분노를 감추고 인내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자제력은 동료들 사이에서 전설적이었다.
스탈린은 신학교 학생 시절부터 레닌을 숭배하였다. 1905년 핀란드에서 레닌을 만난 이후 스탈린은 레닌의 충복으로서 믿음직스럽게 임무를 수행했다. 스탈린은 레닌의 지시로 강도질을 하기도 했다. 두 그룹의 강도 집단을 이끈 스탈린은 사기, 강탈, 무장 강도를 통해 계속 당의 자금을 모았으며, 1907년 6월에는 지폐 운반 마차를 털어 25만 루블을 강탈해 레닌에게 보냈다.
레닌은 민족 문제 측면에서 스탈린에게 많은 의지를 했다. 레닌은 스탈린이 1913년에 발표한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를 좋아했는데, 비러시아인에게 자율적인 행정권을 주어야 한다는 해결책이 자신의 의견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민족 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예리한 분석은 레닌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혁명 국가에서는 전통적인 노동조합주의가 필요 없다며 트로츠키가 촉발시킨 노동조합 논쟁으로 분파 간 논쟁이 격화되자 위기를 느낀 레닌은 스탈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노동자반대파, 민주집중파, 좌익 반대파 등 수많은 분파로 당이 갈라지면서 신생 소비에트 국가가 안으로 붕괴할 위기에 봉착했던 것이다. 지방에서 레닌주의 지지자들을 조직한 스탈린의 도움으로 레닌파는 1921년 당 대회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중앙 당 기구를 확실하게 장악할 사람이 필요했던 레닌은 스탈린을 당 서기장에 올리는 안을 직접 제출하였다. 스탈린은 레닌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자신이야말로 레닌의 적자라고 자임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목숨을 건 정통성 경쟁을 벌였다.
뛰어난 연설 능력과 지적인 능력으로 혁명가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이론가였던 트로츠키와 그루지야 시골에서 올라온 교양 없는 촌놈으로 폄하되었던 스탈린은 10월혁명 직후부터 사사건건 부딪쳤다. 내전 시기에 트로츠키가 러시아 제국군 출신의 장교들을 붉은 군대에 받아들인 것은 투철한 계급 투사 스탈린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구혁명론을 주창한 트로츠키와 일국사회주의론으로 맞선 스탈린은 레닌이 도입한 신경제정책을 두고도 맹렬한 논쟁을 벌였다. 레닌 사후 트로츠키는 권력 투쟁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자로 보였으나, 실제로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은 하부에서 당원들을 설득하고, 자기 세력을 조직하는 데 놀라운 능력을 지닌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그 누구도 최고 권력자가 되리라 예상 못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레닌조차도. 그러나 스탈린은 권력의 생리를 동물적 감각으로 꿰뚫어본 정치의 천재였다. 권력 작동의 법칙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던 그는 권력의 하부를 장악했다. 일반 당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각 하부 단위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배치함으로써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권력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스탈린은 강한 적과 연합하여 더 강한 적을 거꾸러뜨리는 이이제이 수법을 탁월하게 적용하였다. 그는 먼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연합해 트로츠키란 가장 강력한 적수의 힘을 제거한 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물리쳤다. 이때 연합 세력이었던 부하린과 우익 반대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력화시켰다. 그는 서서히 노회한 혁명 투사들을 권력 핵심에서 제거하고 대신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유능한 젊은 인재들을 끌어올렸다.
최고 권력자가 된 스탈린은 단 한 차례의 위기도 없이 자기 의지를 관철한 전제 권력자였다. 그는 공포를 일상화하여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자신이 겪은 시베리아 유형보다 훨씬 가혹한 강제노동수용소를 만들어 혁명 동지들, 의심이 가는 잠재적 배신자들을 몰아넣었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공포 정치 기간에 약 150만 명이 무차별적으로 체포되었고, 이중 75만 명이 총탄 세례를 받고 사라졌다. 스탈린은 레닌 시절에 만들어진 좌익 반대파, 우익 반대파, 노동자반대파, 민주집중파 등등 모든 형태의 반대파들을 뿌리 끝까지 추적해 완전히 제거했다. 분파주의의 뿌리털도 남겨놓지 않고 도려내버린 비정한 근정 정치는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한의 공포였다.
스탈린은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여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5개년 계획을 실시한 1928년부터 1940년 사이 소련의 공업 성장은 연평균 12∼14%를 기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공업 생산량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국가로 부상하였다. 성공적인 산업화로 소련은 낙후한 농업국가에서 세계 최강대국의 하나로 올라설 수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나치즘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성장은 테러에 의한 국민 동원이란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도달한 것이었으며, 그 뒤에서는 농민, 노동자, 정치적 반대파, 소수 민족들의 처절한 희생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러시아사 연구의 권위자 로버트 서비스가 30년간의 연구 끝에 완성한 ‘공포의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삶을 전면적으로 파헤친 전기 '스탈린, 강철 권력'(교양인)에 담겨 있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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