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부쩍 유행을 탄 외래어다. 코드가 맞으면 ‘우리 편’이고 안 맞으면 ‘적’. 그 황량한 이분법을 가름하는 코드는 그러나 허망한 말년을 맞고 있다. 같은 코드로 뭉쳐 ‘한패’를 이루던 인사들이 올해 대선의 해를 맞아 다시 편 가르기에 돌입, 서로 헐뜯고 상처내고 있기 때문이다.
코드를 파헤치는 이 책은 이런 상황에서 매우 유용하며 시의적절하다. 기독교에서 악으로 치부되는 ‘사탄’이란 말이 베어 자른다는 재봉 용어인 ‘재단’(裁斷)에서 왔다는 어원론적 인식마저 다시 가다듬게 한다.
저자는 프랑스 태생 유대인으로 미국에서 과학저널리스트로 활약하는 데이비드 베레비. 인간 부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과 마음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인간을 분류하는 단위는 가족, 학교와 직장, 지역사회, 국가, 종교, 민족, 인종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여기에 동호회, 특정한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 출퇴근길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는 실로 폭넓다.
데이비드 베레비 지음/정준형 옮김/에코리브르/2만원 |
책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것이 한낱 ‘편 가르기’에 지나지 않는데도 왜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지를 파고든다. 저자는 다양한 연구 결과와 심리학 자료를 통해 인간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결과물임을 알려준다.
18세기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백인 찰스 존스턴이 좋은 예다. 평범한 백인으로 산 그는 1790년 쇼니 인디언 부족에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다른 포로라고는 흑인 노예 한 명뿐. 그때를 존스턴은 이렇게 회상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가까이하지 않았을 불쌍한 깜둥이가 내 동료이자 친구가 됐고, 내 마음은 아주 편안했다.” 존스턴은 ‘흑인 대 백인’이라는 분류가 아무 소용없고 오히려 ‘쇼니 인디언 대 영어 사용자’라는 분류가 더 적절한 상황에 놓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존스턴이 평생 고수해온 인종 구분을 무시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베레비는 이처럼 인간 부류를 규정하는 것은 상황과 마음이라고 결론내린다.
“누군가를 구분짓는 코드는 바로 당신의 머릿속에 있으며 당신에 의해 매일 새롭게 만들어진다. (중략) 다시 말해 ‘우리-그들’의 코드가 당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 코드를 지배한다. 인간 부류와 더불어 어떻게 살아갈지는 당신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한 개인을 단 하나의 인간 부류로 규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베레비는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인간의 ‘부족적 감각’이라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작은 방 안에서 혼자만 그룹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낸 사람은 누가 봐도 그룹의 의견이 틀리다는 점이 명백하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바꾼다는 것이다.
황정민 연세대 교수(심리학)는 추천사에서 “인간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 한패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패가 되고 나서 서로 비슷해진다”면서 “우리 모두 국민성, 지역성, 남성-여성, 강남-강북 등의 미신적인 구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이 책의 주장은 복음”이라고 극찬한다.
마지막으로 해묵은 넌센스 퀴즈 하나. “‘남과 여’ 사이, ‘너와 나’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정답은 ‘과’와 ‘와’이다. 남과 여든, 나와 너든, 그 사이에는 단지 단어와 단어를 이어주는 조사만 존재한다. 명저 ‘나와 너’(Ich und Du)에서 인간을 사물화시키지 말고, 나와 너의 인간적인 만남을 중시하라고 설파한 종교철학자 마틴 부버(1878∼1965)가 연상되는 퀴즈라고나 할까.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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