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전공분야를 정하려 하는데 당시 미국에선 의공학 연구가 막 시작되던 참이었어요.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강한 의욕에 의공학을 선택했는데 이렇게 깊이 빠져 버릴 줄 몰랐습니다.”
미국 럿거스대학 의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 교수는 뉴욕의 마운트사이나 의대 병원 연구원생활 2년을 마치고 모교인 럿거스대학에서 조교수까지 지냈다.
그러던 그가 ‘잘나가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79년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서울대는 국내 최초로 의대 안에 의공학과를 설치했는데 민 교수를 최적임자로 꼽았기 때문이다.
◇체외박동형 인공심폐기 T-PLS(왼쪽), 인공심장인 애니하트 |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서울대의 SOS 요청을 ‘조국의 부름’으로 받아들이고 귀국했죠. 지금도 당시의 결심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민 교수는 84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형 완전 인공심장 프로젝트’에 돌입, 각고의 노력으로 3년 만에 한국형 완전 인공심장을 개발해 미국 특허를 받았다. 이후 그는 94년 세계 최초로 ‘완전 인공심장’을 양에 이식하는 쾌거를 이뤘다.
인공심장은 수차례의 동물실험을 통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공심장 연구가 본격화한 것은 2001년. 그는 그해 세계 최초로 체내 이식형 양(兩)심실 보조 인공심장인 ‘애니하트’의 체내 이식에 성공했다. 그 전까지 환자에게 이식된 인공심장은 심장의 좌심실 기능만 대체했지만, 애니하트는 세계 최초로 좌우심실 기능을 모두 대체할 수 있는 인공심장이었다. 이 수술의 성공으로 민 교수의 연구는 다시 한 번 세계 의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환자의 심장을 떼어낸 후 인공심장을 이식하던 기존의 방법과는 달리 애니하트는 환자의 심장을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이식됐다. 수술 후 원래의 심장이 건강해지면 인공심장을 제거하고 자기 심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 최대 장점. 자기 심장을 완전히 제거한 후 인공심장을 이식하면 기계고장으로 인공심장이 정지할 경우 곧장 사망할 우려가 있었다. 반면 애니하트는 설사 기계가 멈추더라도 환자가 자신의 심장으로 4∼5주 동안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안전성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한 셈이다.
그러나 100여명의 연구원이 밤낮없이 매달려 이룬 성과는 환자가 12일 만에 사망함으로써 또 다른 시련의 시발점이 되었다. 환자가 심장질환이 아닌 간질환으로 사망했는데도 학계에선 한국형 인공심장에 대한 안전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역경을 딛고 민 교수는 인체이식 성공 3년 후인 2004년, 세계 최초의 체외박동형 인공심폐기 ‘T-PLS’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임상실험을 통해 T-PLS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확인한 식약청은 정식 허가를 내주기도 전인 그해 2월 응급의료센터로 지정된 종합병원 응급실과 구급차에서 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전례 없는 조치였다. T-PLS는 다리를 통해 연결할 수 있기 때문에 1분 1초를 다투는 응급상황에 신속하게 사용할 수 있고, 심폐의 박동을 그대로 유지해 주기에 심장과 폐가 전혀 기능을 못해도 다른 기관이나 생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게 장점이다.
T-PLS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병원 중 하나인 순천향대 부천병원은 T-PLS 도입 이후 응급실 환자 생존율이 3%에서 40% 이상으로 올라갔다. T-PLS가 없었다면 죽었을 사람들이 소생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동안 자비 수십억원을 들여 개발한 체외 박동형 인공심폐기가 국내에선 외면당하고 있다.
“미국이나 독일, 일본 등 선진국에서 개발한 의료기기는 무조건 믿고 사용하지만, 한국은 국내서 개발한 의료기기는 잘 믿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T-PLS 기기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중국의 심장전문병원에 이미 10여대를 수출했습니다.”
그는 “유럽의 병원들에서도 임상시험을 해보고 싶다는 문의가 빗발치는데 유독 국내에선 국산 장비에 대한 불신 때문에 마음을 열지 않는다”며 거듭 국내 병원의 국산 의료기기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사실 그의 업적은 국내보다 세계 의학계에서 이미 인정받고 있다. 미 하버드대학에서는 그를 초청해 T-PLS의 임상실험을 실시, 우수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3대를 주문했다. 또 미국의 FDA와 같은 기구인 유럽의 CE도 임상실험을 거쳐 T-PLS와 애니하트의 정식 수입을 승인했다. 네덜란드 등에서는 10여대를 수입해 사용 중이다.
민 교수의 좌우명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좌일언가기이행(座一言可起而行)’이다. ‘앉아서 한 얘기는 곧바로 일어나서 행하라’는 뜻이다. 그가 중학교 다닐 때 동양철학에 조예가 깊던 부친이 그에게 들려준 얘기다. 그는 지금 부친의 유언대로 언행일치에 힘쓰며 ‘인술 외길’을 실천하고 있다.
박석규 기자 skpar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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