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서부영화는 미국 영화산업의 가장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폭력적인 무법자들에게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정의의 사나이가 마침내 승리하여 금발의 미녀와 황금마차를 차지하게 된다는 줄거리는 다채로운 변주를 통해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2시간 안에 결판 나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사연은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에 영화관의 허구 공간에서 더욱 매력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일탈적인 인물인 경우에도 끝자락에 가서는 개과천선하여 바른 길로 들어서는 것이 서부영화의 인간 파악이었다. 그 점 그것은 한결같이 예정조화의 서사였다.
존 웨인, 개리 쿠퍼, 앨런 래드 등의 스타를 앞세우고 1940년대와 5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던 서부영화는 그 후 마카로니 웨스턴에 의해서 위태롭게 승계되다가 마침내 슬그머니 퇴장하고 말았다. 솔직히 요즘 나오는 우주 전쟁영화나 범죄 수사 영화보다는 서부영화가 내게는 더 재미있다. 그것이 사라진 것이 아쉽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소멸해 가는 것에 대해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는 감정일 것이다.
처음 구경한 서부영화가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아파치족과의 싸움을 다룬 별 볼 일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주(白晝)의 결투’가 기억에 각인된 최초의 서부영화인 것만은 확실하다. 조지프 코튼의 팬이었던 나는 이 영화도 그의 이름에 끌리어 구경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 것은 아니다. 백인과 인디언 사이의 혼혈로 나오는 제니퍼 존스가 주연이라고 하는 쪽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상영 시간도 길고 스케일도 크고 사건 전개도 복잡한 편인 이 영화는 서부영화치고는 사랑이 전경화(前景化)되어 있고 사필귀정의 정석을 밟는 것도 아니어서 다소 이채로운 편이다.
라이어넬 배리모어가 대목장 주인으로 나오고 조지프 코튼이 큰아들, 그레고리 펙이 작은아들로 나온다. 큰아들은 점잖고 의젓한 인품이지만 작은아들은 거들먹거리고 충동적이고 분별없는 바람둥이이다. 그들의 어머니는 조신하지 못한 행실로 집안에 그림자를 던지고 자식들 양육에도 문제를 남긴 과거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혼혈인 제니퍼 존스가 등장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혼혈의 아내와 그 정부를 살해한 죄로 교수형을 당한 인물이다. 제니퍼 존스는 그레고리 펙에게 끌리고, 이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남자는 그레고리 펙의 총을 맞고 세상을 뜨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총을 맞은 그레고리 펙이 죽어라 하고 제니퍼 존스에게로 기어가다시피 하는데 그 정경이 상당히 오래 계속된다. 그야말로 격정적이고 필사적인 장면인데 결국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을 쏘고 포옹한 채로 죽는다. 아마 서부영화에서나 가능한 사랑과 죽음의 야성적인 합일 장면이었다.
복잡한 가정사가 얽힌 이 강렬한 색채영화에서 제니퍼 존스가 온통 스크린을 지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혼혈로 나오는 그녀를 원시적 관능의 화신으로 만든 것은 이 영화가 1940년대에 제작되었다는 것과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50년대 이전엔 아메리칸 인디언이 부정적으로만 묘사되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관능과 격정이 전경화된 이 영화의 선전광고에는 미국에서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서부영화의 걸작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셰인’이나 ‘하이눈’ 같은 정통 서부극이 누리고 있는 명성을 갖지 못해 이 영화를 기억하는 올드 팬도 별로 없어 보인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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