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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독립군토벌부대원'' 논란 재연

입력 : 2006-08-09 09:34:00 수정 : 2006-08-09 09: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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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관학교 기준 미달…합격 위해 간도특설대 자원"
"1940년초 소학교 교사 재직…시기적으로 안 맞아"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간도특설대에 있었나, 없었나. 해방전 박 전 대통령(이하 직함 생략)의 행적과 관련, 법정 싸움으로까지 번진 이 논란이 "그 분은 간도특설대에 없었다"는 이용(85)씨의 증언으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이씨의 증언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간도특설대 1기로 입대해 간도특설대가 해체될 때 까지 그곳에서 복무한 간도특설대의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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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증언으로 박정희는 간도특설대와 무관하다는 주장에 더욱 무게가 실리게 됐다. 하지만 그렇게 결론난다고 해서 논란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애당초 논란의 본질은 박정희의 일제 협력 이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주군 보병 8단은 간도특설대와 어떻게 다르고, 거기서 박정희가 무얼 했는가는 또 다른 관심사이자 쟁점이다.
간도특설대란 해방전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에서 주로 조선인 항일 무장독립군을 토벌하던 조선인 부대. 만주제국 간도성장 이범익의 제안으로 1938년 9월15일에 설립돼 일본 패망 직후까지 활동했다.
◆법정으로 간 ‘간도특설대 근무설’=“주재덕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박정희는 특설부대 건립 초기 벌써 입대를 했고 1939년 8월24일 대사하 전투에서 최현 부대에 전멸되다시피 한 특설부대에서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중략) 1995년 7월 심양에서 만난 주재덕 선생(당시 76세· 사망)은 ‘키가 작고 빼빼 여윈 사람이며 한국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라고 분명히 짚어서 이야기하였다.”
2004년 2월 국내에 출간된 재만조선인 친일행적 보고서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저자인 중국 옌벤의 조선족 작가 류연산씨는 주씨 증언을 근거로 “박정희가 간도특설대 소속이었다”고 단정했다. 책에 따르면 주씨는 1943년 4월 간도특설대에 참가했으나 이듬해 8월 팔로군으로 귀의한 사람이다.
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차녀 근영씨는 2005년 2월 출판사 대표인 유연식씨와 추천사를 쓴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을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유씨는 지난해 12월 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정필재 검사(현 서울고검 근무)는 공소장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37년 3월25일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3월24일까지 문경소학교에서 근무하다가 1940년 4월쯤 시험을 통해 만주의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략) 공연히 허위 사실을 적시해 박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기소 이유를 밝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관학교 졸업앨범 사진. 윗줄 맨 왼쪽이 박 전 대통령이다.

◆“간도특설대에 있었다”=재판이 진행 중인 가운데 취재팀은 5월29일부터 6월5일까지 8일간 중국 옌지(延吉), 안투(安圖), 룽징(龍井), 창춘(長春)을 찾았다. 모두 만주국(중국에선 일제의 괴뢰국이란 이유로 앞에 거짓 ‘위’자를 붙여 ‘위(僞)만주국’으로 부른다) 시절 일제 침략전쟁에 맞서 항일 무장투쟁이 펼쳐지던 곳이다.
그곳에서 만난 상당수 재중 동포들은 박정희의 간도특설대 근무설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다. 다음은 안투에서 만난 함형도(70)씨의 증언.
“1941년경일겁니다. 제 부친은 함태권인데 그때 안투현 명월구에서 아사히 사진관 기사로 일했죠. 그때 제가 다섯살쯤 됐는데 한 조선인 장교가 칼 차고 일본 군복 입고 사진을 찍으러 오곤 했습니다. 그 때 마다 저를 ‘귀엽다’며 안고 사탕 사먹으라며 돈도 주곤 했지요. 그 분이 창춘(당시 신경)도 왔다갔다 했고 특설부대로 드나드는 걸 여러번 봤는데 어떤 때는 졸졸 따라가면 부대 앞에서 ‘너는 여기 있거라’고 한 뒤 도로 나와 아버지에게 데려다주곤 했습니다.” 함씨는 그에 대해 “막걸리를 좋아했고 경상도 말씨였는데 훗날 흑룡강성 신문에 한국의 역대 대통령 사진이 나온 것을 보고 그분인지 알았다”고 말했다. 생전에 함씨 부친은 그에게 “한국이 통일됐으면 너를 한국에 보내 그분(박정희)에게 얘기하는건데…”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합석한 작가 리용득(70)씨는 “안투에선 박정희가 특설대에 있었다는 걸로 (견해가) 통일됐다”고 전했다.
옛 만주국 수도 창춘에서 만난 사학자 변철호(79)씨도 “간도특설대와 박정희는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 단언했다. 변씨가 그렇게 보는 이유는 세 가지다. 우선 박정희가 1939년 8월 당시 만주에서 주재덕씨 증언대로 간도특설대의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다. 이와 관련, 변씨는 지난 3월6일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기인 중국인 쑹성췬(宋僧群·86·장춘시 청명가 정월2호동 9호)과의 인터뷰 기록을 제시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려면 4년제 중학교 졸업 학력에 20세 미만의 미혼 남자여야 하고, 여러 차례의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쑹성췬은 “입학신청 접수는 1939년 하반기에 시작했으며 각종 심사와 신체검사 합격 후 그해 10월 입학시험을 봤다”고 증언했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른 것은 1939년 10월의 일.
변씨는 “몇백명이 시험을 치는데 수험번호가 15번인 걸로 봐서 박정희는 상당히 일찍 만주에 온 것”이라며 “그해 7∼8월 만주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박정희가 1940년 2월 만주로 떠나며 했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사소식 접하면 향 한대 피워주게’(문경보통학교 31회 졸업생 오태구씨 증언·정운현 저 ‘군인 박정희’ 81쪽)라고 했다는데 소학교 교사 하던 사람이, 군관학교로 벼슬하러 가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 심리학적으로 반드시 ‘불’과 ‘피’를 경험한 사람의 말입니다. 이것으로 미뤄볼 때 박정희는 1939년 간도특설대의 대사하 전투와 관계가 있습니다.”
변씨는 또 “22세로 나이 조건이 맞지 않자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로 편지를 쓰고 이것이 알려져 간도특설대 강재호 대위가 박정희를 시험장까지 데리고 간 것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이낙선(5·16군사쿠데타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상공부 장관 역임) 비망록에도 “박정희는 나이가 너무 많아 입학시험을 칠 수 없게 되자 만주군관학교 앞으로 편지를 썼고, 이 편지가 현지 신문에 소개됐으며 기사를 읽은 강 대위가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됐다”는 구절이 있다.(조갑제 저 ‘박정희’ 87쪽)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중국인 동기생들. 이들은 주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다. 중국 장춘의 역사연구가 변철호씨는 "이들은 박정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말을 아낀다"고 전했다. 왼쪽부터 집주인 우치융(86)과 그의 부인, 왕쓰쥐(王士居·86), 쑹성췬(宋僧群·86)

◆‘간도특설대 근무설’에 어긋나는 사실들=하지만 여러 사실의 조각들이 이런 주장에 모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우선 함씨가 박정희의 이름을 ‘마쯔모도’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 등 두 개다. 또 간도특설대 대원 명단에서 ‘박정희’란 이름이나 창씨개명한 이름 등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변씨는 “견습군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명단에 없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하지만 이용씨는 “만주군관학교 졸업생들이 일주일씩 간도특설대에 와서 훈련받곤 했지만 박정희는 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또 “강재호 대위가 대구사범 선배이기 때문에 박정희를 후원하게 된 것”이라고 강재호·박정희 관계에 대해 새로운 증언을 했다.
이 때문에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시절 창춘에서 안투까지 강재호를 보러 왔을 가능성은 높다. 실제로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송석하(육군 소장 예편·작고)는 1997년 정운현씨에게 “가끔 박정희가 명월구로 놀러와 술을 먹고 갔다”고 증언했다.(정운현 저 ‘실록 군인 박정희’ 123쪽)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이용씨는 “박정희가 안도(안투)에 왔다면 내가 몰랐을 리 없다”며 부인했다. 물론 이씨가 1942∼44년 군사훈련학교에 입학, 간도특설대를 떠나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증언을 모두 신뢰하긴 어렵다.
◆“자발적 침략전쟁 참여란 본질엔 변함없어”=여러 정황과 증언으로 미뤄볼 때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입시 때 자신을 추천해준 강재호 대위 등을 만나러 간도특설대에 왔을 개연성은 짙다. 그러나 간도특설대에 근무했음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는 없다. 박창욱 옌벤대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1939년에 와서 시험을 쳐 1940년 6월에 정식으로 입학한 뒤 42년에 졸업하고 6개월 후 일본 사관학교로 가 1944년 졸업한 뒤 만주군 8단에 배치된 게 44년 5월쯤”이라며 “그러니 특설부대에 있을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없었다고 해서 그가 친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만주군 8단은 일본군도 전투력을 인정한 부대였고, 박정희는 연대장 부관으로 작전참모 역할을 했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이용씨도 “1944년 베이징 부근에서 각각 팔로군 토벌 작전 수행중 박정희를 만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변철호씨 또한 “만주군 보병 8단 역시 간도특설대와 다를 게 없다”며 “해방 전 박정희 문제의 요점은 그가 자진해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박정희가 (해방 후) 중국에 있었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중국 정부는 황제까지도 공민으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숱한 전범을 개조했고 상당수는 자기 잘못 반성하고 공을 세웠습니다. 박정희가 그걸 했다면 더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변철호씨의 주장에 자리를 함께 한 재중 동포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특별취재팀=류순열·김태훈 기자 ryoo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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