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남성 영화’는 지금까지 ‘꽃미남 배우’들에게 하나의 통과의례였다. 남성 영화를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으면 진정한 배우로 한 발 올라서는 반면, 혹평을 받게 되면 얼굴만이 유일한 승부수가 되는 한계가 생긴다. 양날의 칼이다.
“2003년 영화 ‘남남북녀’ 때 ‘더 이상 연기하지 말라’는 얘기까지 들었어요. 그런 과정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겉핥기였다면 이제 좀 더 깊이 들어간 느낌이에요.”
배우로서는 치명적인 “연기를 못한다”는 말을 들었던 그. 각고 끝에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과 ‘봄날’로 우뚝 섰지만 그에게는 연기의 폭을 넓히는 것이 필요했다. 건달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실제 조폭을 만나 ‘취재’도 했다. 주로 어떻게 싸우느냐는 질문보다는 그들이 어떤 말을 쓰는지, 어떤 생활을 하는지 더욱 세세하게 파고들었다.
“‘비열한 거리’는 건달의 세계를 멋지게 보여주지 않아요. 영화를 보고 건달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비열한 세상에서 비열하지 않은 사람들이 비열하게 변하는 것, 그 인간 군상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우리 얘기를 찾는 공감대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에요.”
세상은 언제나 변함 없다. 오늘 나의 행동이 같은 시간 지구 반대편에서 또 일어나듯이, 건달 세계에서 배신하고 배신을 당하는 행동은 계속 돌고 돈다. “건달을 미화하는 내용이었다면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영화는 주인공 건달에게는 연민을, 그를 몰고 가는 세상과 거대 권력에는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다.
“‘짝패’ 등 액션이 화려한 영화들이 많지만, 우리의 강점은 액션영화에 비해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죠.”
‘야수’ ‘사생결단’ ‘짝패’ ‘강적’ ‘열혈남아’ 등 남성 영화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난무하는 영화 속에서 그가 느끼는 ‘비열한 거리’만의 장점은 바로 액션과 강함보다는 현실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강한 주제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그 그림자를 보여주는 29살의 주인공 병두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 계속되는 클로즈업에서 그는 완전히 비극의 주인공 배역에 몰입돼 있었다.
“제 연기의 모든 것은 결국 제 안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어요. 그 모든 면들이 제 속에 포함돼 있는 모습인 것 같아요.”
조인성은 자신감에 차 있다. 시사회가 끝난 뒤 영화와 조인성에 대한 호평이 계속되자 그는 만족감과 기대감으로 약간은 들뜬 모습이다. “연기할 때 워낙 구박당해서 급격하게 노화가 진행됐다”며 29살 외모가 완성됐다고 너스레를 떨 만큼.
# 사람 사는 것, 별반 다를 게 없다. 조인성도
조인성은 목소리가 강한 배우다. 그리고 그는 대사 인용을 좋아하고 자신의 의견을 얘기할 때 비교하기를 즐긴다.
“자신이 없다는 것이 아니죠. 한국식 블록버스터 100편을 만들 수 있는 돈으로 제작된 블록버스터는 출발점 자체가 다르니까 그건 자신감 문제가 아니라 경쟁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스크린쿼터는 필요하다고 봐요.”
그가 인터뷰 중 언성을 높인 것은 두 번이다. 나이가 어려 비열한 세상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세상 자체가 비열하고 ‘내가 살기 위해 싸우는’ 처절한 현실을 얘기할 때 병두의 캐릭터에 몰입해 흥분했고, 한국영화 위기론이 커진 지금 스크린쿼터를 얘기하면서 또 한 번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몇 번씩 걸러 모범답안을 만들어 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말한다. 실수가 생길 수 있더라도 그가 자주 쓰는 말처럼 “제가 나쁜 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은 배역 얘기만 나오면 흥분할 정도로 몰입하는 그가 건달 ‘병두’에게서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었을까.
“두 부류의 배우가 있어요. 누군가는 배역에 몰입해서 몇 달씩 그 역할에 빠져 있기도 한대요. 근데 저는 ‘컷’ 하는 순간에 그냥 바로 빠져나와서 장난을 치는 쪽이에요.”
비장미가 물씬 풍기고 아주 ‘센’ 역할에 몰입했지만 그는 이제 온전히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가 비교를 좋아하는 건 ‘선례’가 있기 때문에 ‘불가능은 없다’는 자기 암시 같은 것이다. 영화가 길지 않냐는 질문에는 “‘킹콩’ ‘타이타닉’도 3시간짜리 영화인데 지루하지 않다. 드라마만 괜찮다면 영화가 길다는 사실 자체는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가 하면, 18세 이상 관람가의 ‘남성 영화’가 흥행은 힘들지 않냐는 말에는 “‘친구’도 18세 영화인데 800만명을 동원하지 않았냐”며 지금의 가능성을 계속 확인한다.
실제 이번 영화가 발견한 최고의 가능성은 바로 배우 조인성의 가능성이다. 청춘 스타의 이미지를 버리고 ‘껄렁껄렁’한 건달로 변신한 조인성, 그는 오히려 이보다 더 망가지기도 했다며 이번 영화는 망가진 것도 아니라고 펄쩍 뛴다.
“시트콤 ‘논스톱’할 때 제가 얼마나 망가졌는데요. 흰 구두를 신고, 할아버지 분장도 하고, ‘변’을 보는 장면도 다 찍었어요. 저 정말 ‘논스톱’에 출연하길 잘한 거 같아요. 그 이상은 망가질 수가 없으니까요.”
이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조인성에게 남은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제가 출연한 영화 ‘마들렌’에 이런 대사가 있어요.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살고 싶지는 않아요’ . 순간순간을 느끼며 살고 싶어요. 처음보다 끝이 아름다운, 기억에 남는 배우로 남고 싶어요.”
25세의 젊고 잘생긴 톱스타 조인성. 그가 ‘비열한 거리’에서 인용한 대사처럼 ‘조인성’이라고 다를 거 있겠는가.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다.
글 정진수, 사진 황정아 기자 yamyam1980@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