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언문(文言文)으로 써낸 ‘안중근자서전’과 박은식의 ‘안중근전’, 김택영의 ‘안중근전’, 정원(鄭沅)의 ‘안중근’, 1911년 공소근(貢小芹)의 ‘망국혼전기(亡國魂殿記) 등이 모두 한어(漢語)요, 중국 사람들이 써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깨가 으쓱해진다. 손중산 선생의 초대 고문 장태염과 저명한 중국 학자 양계초의 휘호를 봐도 중국에서의 안중근 기념활동은 세인을 놀라게 한다.
중국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가 부인 덩잉차오와 함께 1913년 8월부터 1917년 6월까지 중국 톈진 난카이중학에서 공부할 때 ‘안중근’ 연극을 했고 조선 사람들도 지린성 퉁화지구에서 ‘안중근’ 연극을 했으며, 1998년 김우종, 리동원 교수가 ‘안중근의사’를 펴낸 것을 보면 중국 인민들의 안중근 기념활동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1928년 상하이 대화백합(大華百合)영화공사에서 ‘안중근’(애국혼) 영화를 촬영했고 1937년에 저우언라이, 궈모러의 지도 아래 전한(田漢)이 꾸린 극단 남사(南社)가 우한, 창사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안중근 연극을 했다. 그런가 하면 항일전쟁시기 상하이 민우보(民旴報), 상하이신보, 톈진 ‘대공보’(大公報), 홍콩 화문일보(華文日報)에서 89편에 달하는 안중근 기념 문장과 사설을 발표했다.
1939년에는 반야월(본명 박창오·89) 선생이 진방남이란 이름으로 국제주의자―안중근 항일열사를 기리는 노래를 창작했다. 뿐만 아니라 다롄시와 하얼빈시에도 안중근 동상이 정중하게 모셔져 국내외 학자, 교수, 전문가 등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개조’에서 “동양평화론을 깨뜨려 몇억만 인종으로 하여금 장차 멸망을 못 면하게 한 일”이라고 일본 침략자들을 규탄했으며 1910년 2월12일 심판대에서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그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 간을 소격(疎隔)시키므로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주살(誅殺)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이 더 친밀하게 되고 평화롭게 다스렸다면 나아가서는 오대주에도 시범해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 한일 간의 평화는 만세에 유지될 것이며 나는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안중근을 단순히 조국 광복을 위해 순국했다, 혹은 편면적으로 ‘한국인’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국제주의 전사·항일열사 안중근 장군이시어, 부디 고이 잠드시라.
최용린·중국 옌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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