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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적 서독 차관 교섭[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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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래혁 상공부장관이 이끈 한국경제사절단은 1961년 서독 정부의 경제성 베스트릭 차관과 비공식 교섭을 벌였다. 차관교섭 당시 경제성을 이끌었던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장관의 1958년 방한 당시 중앙산업을 시찰하는 모습(국정홍보처 국가기록사진관 소장).


▶비공식적으로 이뤄진 서독과의 차관 교섭

한국과 서독 정부간 차관교섭 회담은 1961년 12월11일부터 시작됐다. 한국경제사절단이 한국을 떠난 지 거의 1개월이 다 되어가던 시기였다. 한국경제사절단은 이 사이 영국의 산업시설을 시찰하고, 이태리와 스위스를 거쳐 독일에서도 기업을 시찰했던 것이다.

양측의 협상에는 한국측 대표로 정래혁 상공부장관과 신응균 주서독한국대사 등 10명이 나섰고, 서독측에서는 루드거 폰 베스트릭 경제성차관 브루노 태팬 외자협조처장 프리츠 슈페펠트 외자협조처 차장 등 10명이 나섰다.

당시 차관 교섭은 독일 연방경제성 차관의 응접실에서 베스트릭 차관을 중심으로 한 비공식 협상이었다. 베스트릭 차관은 능숙한 솜씨로 협상을 이끌었다고 한다. 백 박사가 전하는, 주요 대화요지다.

베스트릭 차관=“돈(차관)을 빌려서 무엇을 하려 하느냐?”

한국경제사절단=“우리는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독의 차관을 빌려 공장을 짓고 사업을 하려 한다.”

한국 경제사절단은 미리 준비했던 공장 리스트와 사업계획서를 베스트릭 차관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한국이 서독 정부에 제시한 공장 및 사업은 ▲나주 비료공장 건설 ▲인천 한국기계공장 확장 ▲석탄공사 관산중장비 ▲인천제철확장 ▲삼척 동양시멘트 공장 ▲중소기업 기계공장 지원 등이었다.

한국경제사절단과 서독 정부간 설명과 질문, 대답이 계속 됐다. 한국측은 한국민은 근면한 국민이며, 한국은 동아시아의 민주주의 보루로서 잠재성이 있음을 강조하는 논리를 구사했다고 한다. 정래혁 장관의 기록이다.

우리는 독일정부에 대해서 장래에 있어 한국 경제의 자립을 위해서는 연간 3억달러 정도의 외화를 가득하는 경제기반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자본도 기술도 없는 상태이다. 다만 있는 것은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이를 타개해 나가는 젊은 추진력이 있고 열심히 일하는 국민이 있다. 극동 아세아에서 자유민주주의 보루인 대한민국을 도와서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은 세계의 자유민주주의 역량을 키워서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정래혁, 『격변의 생애를 돌아보며: 정래혁 회고록』,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서울, 2001, 276~277쪽).

언론보도에 따르면, 정 장관 등은 각각 4개 항목의 정부차관과 민간투자, 그리고 1개 항목의 기술원조를 내용으로 하는 9개 조항의 의제를 제시했다고 한다. 특히 정 장관은 일시적인 원조보다는 서독이 한국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과 대응하여 협력해줄 것을 부탁한 것으로 전해졌다(조세형 특파원, 「정 상공 서독경제상과 회담」, 『한국일보 1961년 12월 12일』( 석간), 1면 참고).

회담 이틀째인 1961년 12월 12일에는 에르하르트 경제성장관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정 장관과 신 대사는 30여분간 서독 경제성에서 에르하르트 장관과 회담했다. 나중에 수상이 되기도 하는 에르하르트 장관은 육중한 체격에 입엔 시가를 물고 협상단을 맞았다고 한다.

회담에서 정 장관은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설명하고 경제원조와 차관을 부탁했고, 에르하르트 장관은 건전한 장기계획에 대해선 원조를 할 것이라고 긍정적인 답변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와 서독 정부간 차관교섭은 이날이 최대 고비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날 회동에서 비로소 서독측이 차관 제공을 사실상 승인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언론 보도에서도 드러난다.

에르하르트 경제상과의 회담이 끝난 후 정 장관은 본 기자에게 일련의 회담이 끝나는 13일 모종 문제의 합의에 관한 공동 ‘코뮤니케’가 발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여러 소식통들은 기대되는 서독의 대한원조액수에 언급하면서 1962년 제1차년도를 위한 원조액수는 아마도 1억불이 되지 않지만 5000만불은 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조세형 특파원, 「1차 년도에 약 5000만불 서독, 장기차관을 약속」, 『한국일보 1961년 12월 13일』(조간), 1면).

드디어 협상 3일째 되던 1961년 12월 13일. 베스트릭 차관은 한국경제사절단과의 협의에서 차관규모를 최종적으로 확정하게 된다. 서독측은 3억마르크(약 6000만달러)를 요구하는 한국측의 요구에 대해, 절반 수준인 1억5000만마르크(약 3750만달러)를 제공키로 한 것이다.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당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롭고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김소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중에서, 오하근편, "정본 김소월전집", 집문당:서울, 1995,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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