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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 "우리 최고음악인 김현식"

입력 : 2005-11-19 20:59:00 수정 : 2005-11-19 2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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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동아기획 화려한 부활 예고
유재하는 쾌활한 바람둥이
조동진, 들국화, 김현식, 봄여름가을겨울, 김현철, 빛과 소금, 푸른 하늘, 한동준, 박학기 등등 80, 90년대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빛낸 명장의 배후에는 하나같이 동아기획이라는 이름이 자리하고 있다. 트로트 일색이던 가요계에 록과 블루스, 재즈를 본격 도입하여 우리만의 투명한 서정성과 깊은 음악세계를 펼쳐보였던 실력파 음악인들의 사운드를 혹자들은 그래서 ''동아기획사운드''라 이른다. ''머지비트''나 ''서브팝''처럼 지역명이나 레이블이 고유명사화되어 특정 사운드 양식을 뜻하는 해외와 달리 인기 순위와 10대가수 명단만이 회자되어온 우리 상황에서, ''동아기획사운드''란 명칭의 탄생은 가요계에 대한 객관적 고찰과 평가의 차원에서 분명 의미심장한 일이다. ''동아기획 사운드''를 있게 한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의 산파 김영(사진·58). 18일 여의도에 있는 동아기획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봤다.

- 최근 일부 음악팬들을 중심으로 동아기획이 ''망했다''는 소문이 일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따르지 못한 탓에 고전을 거듭, 결국 2000년대 초반 몇몇 댄스 음반을 발표한 뒤 완전히 사라졌다는 소문이 있는데….

음반이 망해서 좀 쉬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망했다는 건 충격이다. 우선 나는 이제까지 댄스음반을 발표한 적이 없다. 물론 이는 장르에 대한 편견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노력해왔던 음악에 대한 소신 때문이다. 이달 초 정경화의 4집 앨범을 제작해 홍보활동에 나섰다. 차기작은 박완규의 앨범이다. 은퇴는 아직 멀었다.

- 그런데 인터넷에서 보면 동아기획의 홈페이지도 없고, 일단 음반 검색을 해도 무명가수 몇명이 나올 뿐 최근작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2002년 이후 제대로 활동 못한 게 사실이다. 그 해는 봄여름가을겨울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김현철의 ''…그리고 김현철''이란 듀앳 앨범을 제작했는데, 내 생애 처음으로 적자를 봐야 했다. 사정이 그러니 어떻겠는가. 이듬해 KBS 본관 앞에 있던 사무실에서 이 곳(국민일보 옆)으로 옮겼다. 직원도 줄어서 나를 포함 총 4명이다. 홈페이지 운영비도 한달에 500만원이 넘게 들어 포기해야 했다. 이는 음반시장의 침체 때문이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2003년 가요 시장은 완전히 죽었다"

- 일부에서는 기존 가요의 틀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혹시 시대 변화에 둔감했던 것이 아닌가.

동아기획은 1980년 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나름대로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2003년은 한국 가요계의 시장이 완전히 침몰한 시기다. 시장이 사라졌다는 것은 소비자들이 음반을 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3억을 투자하면 1억을 건지기 힘들다. 인터넷으로 공짜 음악을 듣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건재하겠는가. 2000년 SM과 서울, 예당, 대영, 우퍼, 신촌 등 8개 제작사가 합작하여 ''IK팝''이란 회사를 세웠지만, 지금 남아있는 회사를 봐라. 우리 회사 경우 3년간 죽어 있어야 했고, 대영은 거의 망한 것과 마찬가지다. 우퍼는 정말 망했다. 일부 신생 제작자들이 있지만 이들도 적자는 마찬가지, 어떻게 운영되는지 그 수익구조를 도저히 알 수 없다.

- 그래도 히트곡 리스트를 보면 신생 제작자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는데, 그들의 음악이 대중들에게 주효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들은 이전의 세력들이 무너지니,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뿐이다. 한두 곡 히트할 뿐,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열지 못하고 있다. 2003년 이후에는 스타의 크기 자체가 줄어들었다. 조용필, 김현식, 서태지와 같은 스타가 있는가? 뚜렷이 내세울만한 이들이 없다. 신생사들이 운영되는 이유는 비연예계 출신 자본주들이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실무는 기존 음반사 출신의 매니저들이 맡는다. 어느 정도 돈을 탕진하면 사라지고 사라지고. 우리는 그를 손님이 왔다, 손님이 간다고 말한다.

- ''빛 좋은 개살구''란 말인가.

요즘 히트곡을 봐라. 대부분 드라마나 영화 주제곡이다. 앨범 판매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또한 요즘은 일단 홍보비를 비롯 가수에 투자되는 외부 경비가 엄청나다. 수천에서 수억에 이르는 뮤직비디오 제작비에, 케이블 홍보비까지 제작자들 허리가 휜다. 많은 사람들이 케이블 음악전문 채널에 나오는 뮤직비디오는 제작진이 선곡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특정 기간에 몇 번 틀어주는 것을 조건으로 99% 돈을 받고 하는 광고다. 신청곡과 순위 또한 다 계약에 있는 곡들만 나온다. 케이블에서 자주 소개된다 해서 그 곡이 인기 있다고 생각하면 착오다. 2002년 김현철의 ''러빙 유''의 경우 석 달 홍보비가 1억 8000만원이었다. 지금은 더 심해졌다.

- 콘텐츠 제공자측이 돈을 낸다니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제작자들의 반발은 없나.

제작자 협회 차원에서 수차례 반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는 세금계산서를 끊고 하는 합법적인 거래다. 개선될 기미는 없다.

"2006년은 동아기획이 새 시대 연다"

- 그렇다면 음반시장에는 희망이 없는가. 정경화를 필두로 재개를 시작했는데.

사실 2004년 자살까지 결심했다. 벅스와 소리바다의 공세, 유료화시장 실현이 요원한 상황에서 정말 암울했다. 그러나 언제인가는 시장이 열릴 것이라며 다독였고, 결국 그 때가 왔다. 올해 7, 8월을 기점으로 벅스 유료화가 결정되고, 소리바다 불법서비스도 어느 정도 차단됐다. 음악이 필요하면 돈을 주고 사는 상황이 되었으니 희망이 있다. 2006년부터는 동아기획이 새 시대를 연다고 확신한다. 지켜봐 달라.

- 온라인 음악 시장을 낙관한다는 말인가. 음악 자체로 봤을 때는 쉽게 음악을 듣고, 버린다며 안타까워 하는 의견도 있다.

성시완씨와 같이 예전의 LP나 CD 등을 고집하면 물론 좋다.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현실을 봐야하지 않겠는가. 만약 모든 제작자들이 온라인으로는 음원을 공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모르겠으나 그는 이상일 뿐이다.

- 요즘 파스텔뮤직 등이 인디밴드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인디밴드 음반을 제작할 생각은?

음악시장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물론 그룹사운드와 인디밴드들의 발전이 있어야 한다. 이전에 황신혜밴드와, 어어부밴드, 도시락특공대를 제작한 바 있다. 그러나 인디 밴드들의 문제는 두가지, 밴드내 멤버들의 기량이 고르지 않다는 것과 음악의 객관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만 음악을 하기 때문에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낮다.
특히 대학가요제 등에서 신인 밴드들을 지켜보는데 멤버들간 기량 기복이 심각하다. 실력있는 이들을 모아 새로운 밴드를 구성하자고 제안도 해보지만 그 때마다 의리를 내세운 논리에 부딪힌다. 들국화의 경우는 허성욱이나 전인권, 주찬권, 최성원 등 멤버 하나 하나가 모두 ''맹장''이었다. 음악은 확바꿀 수 없는 만큼, 장르 상관없이 좀 더 세련되고, 좋은 음악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좋은 음악이란 흐름을 선도하는 동시에 동양 색채 담긴 창조적인 것"

-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

복잡한 문제다. 평범하게 답하자면 시대 흐름을 선도하는 동시에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이다. 전자는 우리나라 내부에 국한된 문제이고, 후자는 세계적인 문제이다. 한국 음악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어봤을 때 편곡, 사운드, 진행 등 부끄럽지 않게 답할 수 있는 음악이 바로 한국 대표 음악이다. 팝이란 어차피 미국음악이기 때문에 결코 이길 수 없다. 결국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전통 국악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과는 상관없이, 동시대적 관점에서 우리 동양의 색채를 담은 창조적 음악을 뜻한다.

- 제작자의 입장에서 본 요즘 음악의 음악성이 궁금하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모든 장르가 가치를 지닌다. 지금의 문제점은 각 장르별 음악의 완성도와 깊이가 얕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요즘 20, 30대는 음악을 치열하게 듣지 않는다. 물론 들을만한 음악을 만들지 못한 제작자도 잘못이지만, 80년대에서 2000년까지는 음악가도 훌륭했고, 감상자도 그만큼 훌륭했다. 대부분이 인트로나 몇 소절만을 듣고 그 곡의 가치를 판단하니 안타깝다. 새로운 음악의 가치를 느끼려고 하지 않으니, 예전에 맛을 봤던 음악 즉 리메이크가 인기를 끌지 않겠는가.

- 리메이크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창장력의 부재를 향수로 채운다거나, ''쿨(cool) 문화''에서 ''웜(warm)문화''로 옮겨가면서 다시금 정을 중시했던 옛 가요의 정서가 부각된다는 해석이 있다.

문화적 분석까지 들어가 본 적은 없다. 몇 년새 걸출한 스타가 없음에서 알 수 있듯이 일단 가요계 창작력이 떨어졌다. IMF와 ''인터넷공짜시대''가 열리면서 대곡을 쓰던 친구들이 떠났고, 더구나 댄스음악의 열풍이 일면서 그 빈자리를 이전 능력의 50%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들이 채웠다. 제작자들 입장에서는 예전 것을 끄집어내면 비용도 절감되고, 실패 가능성도 낮기 때문에 자연히 리메이크를 선호한다. 그런데 이는 일시적일 뿐, 새로운 시대를 낳을 수는 없다. 음악계는 새로운 창작능력을 지닌 가수가 ''파괴적 형성''을 낳아야만 한다. 지금의 현상은 수년 전부터 예상한 바다.

"리메이크는 아무나 해서는 안 된다"

- 외국에는 원곡을 능가하는 많은 리메이크 사례가 있는데, 리메이크를 무조건 나쁘게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물론이다. 그러나 리메이크는 아무나 하면 안 된다. 먼저 가창력이 되어 그 소리의 느낌이나 멜로디, 가사의 감정을 제대로 소화해서 재창조할 수 있는 사람만이 리메이크를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신승훈과 김건모 등 몇 명만이 리메이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아기획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원래 음악을 했었다. 78년 광화문에 ''박지형레코드''라는 음반 가게를 열었는데, 대부분의 고객이 팝과 클래식만을 사지, 우리 음악은 사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100명이 넘는 고객을 상대로 왜 팝음악을 사는지 그 이유를 조사했다.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한국음악은 들을 게 없다''. 순간 충격을 받아 연구를 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팝음반은 턴테이블의 라벨 게이지를 5정도만 넣으면 소리가 풍성한데, 가요는 10정도 넣어야 했다. 또한 동시에 소리가 찌그러지고 쨍쨍거리는 현상이 일었다. 당시 미국 음반은 8채널 혹은 16채널로 녹음한 반면, 우리는 2채널로 녹음한 결과였다. 당장 서울스튜디오를 찾아가 사장을 만났는데, 그는 한국에는 아직까지 16채널 녹음 장비와 그를 다룰 엔지니어가 없다며 80년대나 되면 그런 장비가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나는 공부에 공부를 거듭했다. 편곡과 연주, 사운드 등 음반 제작에 필요한 모든 분야를 섭렵했다.

"들국화 1집서 가요 사운드 신기원 이뤄"

- 최초 제작은 어떤 앨범인가.

82년 조동진 1집이다. 그러나 최초로 16채널 녹음이 도입된 것은 85년 9월에 발매된 들국화의 1집이다.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스튜디오에서 살았고, 들국화 1집에서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당시 스튜디오 녹음 부스안에서 악기 위치를 바꾼 게 주효했다. 이전에는 일반 공연 무대처럼 드럼을 맨 뒤에, 보컬을 앞 자리에 놓고 녹음했는데 한 번 발상을 바꿔 각 악기 위치 구성을 반대로, 그러니까 드럼을 맨 앞자리에 놓고 보컬을 악기 부스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사운드가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가요계 최초로 풍성한 팝사운드가, 그동안 듣지 못했던 소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 김현식과 유재하 등 한국 음악계 거장들과의 많은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다. 유재하의 경우 포크가수인 이원재와의 경쟁에서 탈락, 결국 서울음반에서 음반을 발표했다고 들었다. 가요사의 명반을 놓친 게 후회스럽지 않은가.

잘못된 소문이다. 이원재는 이원재대로 따로 음반을 냈다. 원래 유재하는 김현식의 3집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세션 멤버로 내가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집이 유복한 탓에 김현식 3집 녹음과는 별도로 자비를 털어 자신의 독집을 녹음한 것이다. 어느날 녹음이 다 되었다고 해서 나는 테이프 마스터링과 공윤심의, LP시험판을 찍어주는 일을 했다. 당연히 앨범 제작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조원익이라는 베이스 치는 친구가 음반 제작업을 하려는데 도와달라며 유재하의 앨범을 넘겨달라 했다. 유재하도 좀 도와주면 어떻겠냐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조원익이란 친구가 음반 홍보를 잘못해서, 음반이 잘 팔리지 않았다. 유재하는 징징대지... 두 사람을 불러 따끔하게 혼내줬다.

"유재하는 쾌할한 성격의 바람둥이…김현식은 정 많아"

- 유재하는 어떤 성격이었나.

사람들은 워낙 유재하의 유작이 머리에 박혀 그를 내성적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요즘말로 하면 개그맨이다. 그만큼 밝고 재미있는 친구였다. 또 미남은 아니었지만 바람둥이였다. 얼마나 여자가 많았냐면 하루가 다르게 바꼈을 정도다. 다른 멤버들은 늘 심각하게 연습하는데, 늘 여자들이 연습실 한 켠에 쭈그리고 앉아 있어 김현식한테 야단 맞았다. 반면 김현식은 여성들한테 인기는 많았지만, 사적인 부분과 음악은 철저히 구분했다. 연습실에 데리고 온 적이 없었다.

- 김현식을 회상한다면.

김현식은 대마초와 필로폰 등 마약에 빠져 고생한 적이 있다. 87, 88년 무렵 나는 마약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그를 수차례나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적이 있다. 지금도 잊지 않는다. 순천향병원 옆의 백제병원이었다. 그리고 그의 방에 기타와 녹음기, 컴퓨터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그 안에서도 곡을 썼다.
한편 김현식은 정이 많았다. 돈을 벌어도 자기가 가질 줄을 몰랐다. 가족과 음악 작업에,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다. 길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점퍼를 벗어준다거나 군고구마 장사에게 잡히는 대로 10만원을 쥐어준 적이 있다.

- 동아기획사운드가 각광받았던 이유라면.

훌륭한 아티스트와 동아기획 정신이 결합된 결과이다. 대중음악의 성쇠를 보면 70년대는 트로트와 그룹사운드가 유행했으나 스타는 있어도 음반 판매가 높지 않았다. 80년대는 음반시장이 팝과 클래식이 80%, 가요가 20%를 이루었지만 완성도는 대중음악이 50, 팝이 100정도였다. 동아기획은 이러한 불균형에 대한 해답이었다. 홍보보다는 음악성 완성도가 전부 내지 전부인 그런 시대를 연 것이다. 레코딩에 대한 돈과 시간의 투자, 음악인에 대한 배려를 최우선으로 삼았으며 음반에 담기는 내용물에 치중했다. 당시는 음악인이 되고 싶으면 본인이 끊임없이 연습하는 시기였다. 일례로 김현식 또한 녹음하기 전에는 합숙훈련을 했다. 또한 전국적으로 300~500개의 팀이 동아기획에서 음반 한 번 내는 게 꿈이다고 할 정도로 음악을 마음 속에 가진 자들이 많았다. 그것이 동아기획을 있게 한 배경이었다.

그와 함께한 이들 중 최고의 뮤지션이 누굴까 궁금해 "어려운 질문이겠지만"하고 운을 뗐더니 의외로 대답은 간결하다. "단연 김현식!" 그리고 김현식에 대한 찬사가 쏟아진다. "그저 빨리 떠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집착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그런 인물이 빨리 가요계에 등장해야 하는데....그처럼 멋있고, 노래 맛있게 부르고, 어떤 음악이든 그럴 듯하게 부르는 이가 있나. 모든 걸 갖추었다." 본인도 괴로워 했을 만큼 작곡력이 부재하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짤막하게 답한다 "신이 모든 것을 줄 수 없지 않는가."

세계일보 인터넷뉴스팀 이창호 기자 tabularas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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