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경쟁력 앞세운 중국산과 ''생존경쟁'' 1990년 초반까지 만해도 우리나라는 ‘신발대국’이었다. 운동화 구두 할 것 없이 세계시장의 40%는 ‘메이드 인 코리아’로 채워졌다. 그러나 지금 국내에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신발산업도 의류·완구·모피 산업처럼 경쟁력이 무너짐에 따라 거의가 중국으로 옮아갔기 때문이다. 이젠 중국이 한국을 대신해 전 세계 신발시장의 65%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중국 신발산업의 본거지는 광둥(廣東)성 공업지대와 저장(浙江)성 원저우(溫州),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 등지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신발이 유럽과 미국 시장을 휩쓸고 있다. 한국 신발산업도 중국을 기반으로 중흥을 꿈꾸고 있다.
중국의 국부로 불리는 쑨원(孫文)이 태어난 광둥성 중산(中山)에는 바오위안(寶園)이라는 대만계 신발공장이 있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중국인은 2만명이 넘는다. 밤낮없이 돌아가는 이 공장에서는 나이키와 리복 같은 세계 유명 브랜드의 운동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곳뿐이 아니라 인근 둥관(東莞)과 푸젠(福建)성 진장(晉江)에도 대만계 신발공장은 들어차 있다.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남부 주장(珠江)삼각주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신발은 연간 30억켤레가 넘는다. 전 세계인 두 사람에 한 켤레꼴로 나눠 줘도 되는 양이다.
이런 광경은 얼마 전만 해도 부산에서 볼 수 있던 모습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 신발생산 중심지가 중국으로 옮아가면서 대만과 중국계 자본이 경쟁국인 한국을 따돌리고 세계적인 신발메카를 중국 남부에 만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신발상들의 재기전도 만만치 않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뛰어들어야 하는 법. 중국시장에 뛰어든 크고 작은 국내 신발상들이 칭다오와 광둥성 광저우(廣州)를 기반으로 시장쟁탈전을 벌이며 ‘신발 한국’ 재건에 나서고 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신발산업=국내 신발업체들이 가장 먼저 건너간 곳은 칭다오다. 한국 신발상이 건너오기 시작한 것은 90년 전후이지만, 95년까지 거의가 이곳으로 넘어오게 됐다.
나이키 신발을 생산하는 세원은 1993년 4400만달러(약440억원)를 투자해 칭다오 자오저우(膠州)에 생산기지를 구축했으며, 역시 나이키 신발을 만드는 태광실업도 1995년 칭다오 라이시(萊市)에 1억4500만달러를 투자해 운동화 생산기지를 만들었다. 이들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은 각각 1만명에 이른다.
이들 외에도 운동화 제조업체인 태성과 축구화 제조업체인 성진화학, 창신, 텔셀, 태경산업, 삼영, 삼덕통상 등 신발 완성품을 만들거나 부품을 제조하는 기업들이 들어서 있다. 톈진(天津)에는 자체 브랜드인 ‘트렉스타’를 앞세워 각종 스포츠화를 만드는 성호실업이 1995년 설립한 제1공장에 이어 2000년에는 제2공장을 만들어 연간 300만켤레 이상의 신발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 중 웬만한 회사의 투자액은 1000만달러가 넘는다. 광둥·푸젠성에서 대만계 자본이 맹위를 떨치는 데 반해 한국계 신발자본은 중국 화북을 근거지로 새 시대를 열고 있다.
◇김창명 사장 (왼쪽), 이선희 사장. |
이선희(李先熙) 알 슈즈 사장은 “부품·재료 산업이 발달한 광둥에는 모든 원·부자재가 널려 있다”며 “소량 다품종을 생산해야 하는 수제화 업체로서는 이 같은 환경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광둥에서 가장 강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말했다.
중·소 규모의 수제화 업체가 중국으로 본격 건너온 것은 대형 신발업체보다 늦은 2000년 전후. 1990년을 전후로 중국에 고급 수제화를 수출했던 리아트는 2000년부터 광저우를 기반으로 ‘리아트’라는 자체 브랜드 구두를 중국 내수 시장에 풀고 있다.
알 슈즈도 스니커즈계 신발에 관한 한 고급신발 공급 업체다. 일부는 국내 유명 브랜드에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공급하고 있다. 최근 광저우에는 중국 업체에 하청을 주는 국내 구두상도 부쩍 늘어나고 있다.
김창명(金昌明) 재중광저우한국상공회 사무국장은 “한국 수입 구두는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가며, 그 중 상당수는 광저우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는 도매상뿐 아니라 소매상까지 광저우로 몰려들어 중국 업체에 하청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신발산업=주장삼각주 하구에는 광저우와 둥관, 선전, 후이저우(惠州)가 서에서 동으로 이어져 있다. 중국 경제 발전을 이끄는 핵심도 이곳이다. 이 가운데 후이저우의 동편에 있는 후이둥(惠東)은 그야말로 신발도시다.
이곳에는 가내 수공업 형태를 합쳐 7000∼8000개 공장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시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구두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주로 ‘싸구려’로 평가받는 구두가 생산되는데, 이들 구두는 유럽과 러시아로 수출되고 있다. 국내 구두 도·소매상들도 이곳에서 구두를 만들어 간다. 이곳뿐 아니라 광저우의 산터우(汕頭), 둥관 지역에도 신발공장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이 밖에도 푸젠성의 진장과 저장성의 원저우에도 4000∼5000개의 신발공장이 모여 있다. 이들 지역에는 광둥과 마찬가지로 구두·운동화 하청공장이 모여 있으며, 특히 원저우에는 인조가죽을 이용한 운동화와 이미테이션 신발로도 유명하다.
중국의 상인집단 중 가장 유명한 원저우 상인은 원저우에서 만든 신발을 해외에 나가 직접 팔기도 한다.
지난해 스페인에서 신발업체들이 ‘중국 신발은 물러가라’며 불태운 것도 원저우 상인의 신발이었다. 최근에는 중국 신발상들이 고유 브랜드로 세계 신발시장에 발을 뻗으려는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
광저우·칭다오=강호원 특파원
hkang@segye.com
"중국 신발산업 발전뒤엔 한국기술자들이 있다"
◇이태식 사장 |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신발상들은 중국 신발산업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중국계, 대만계를 가리지 않고 내로라하는 대형 신발업체에는 한국 기술자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신발에서 가장 중요한 제작 기술 중 하나는 몰딩이다. 밑창을 만드는 이 기술은 좋은 신발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손재주 좋은 한국인의 몰딩 기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태식(李泰植) 리아트 사장은 “가격 경쟁력에서 버거운 한국 신발산업이 세계적인 브랜드로부터 인정받는 이유는 바로 이 몰딩 기술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 신발산업이 무너진 뒤 기술자들은 하나둘 대만·중국계 기업으로 뽑혀가고 있다.
이들 기술자는 1970∼90년대 세계 최고 경쟁력을 자랑했던 한국 신발산업이 길러낸 인재들로, 국내에 설자리가 없어지면서 대만과 중국계 신발업체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사장은 “이들의 기술은 단지 몇 년 배워 얻어지는 기술이 아니다”며 “중국 신발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것은 외국 신발자본의 진출과 함께 이들 고급 기술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들 대부분은 현재 광둥성, 푸젠성 등지에서 세계 유명 브랜드 신발을 생산하는 대형 공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 신발산업이 이들 기술을 활용하기 힘들어지면서 국내 신발산업이 쌓아온 제조기술이 중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광저우=강호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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