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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46> 간다라 지방의 탁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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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5-11-04 18:57:00 수정 : 2005-11-04 18: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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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힌두교·기독교가 교차한 ''역사 보물창고'' 불상이 탄생한 간다라 지방은 아프가니스탄 국경에서 인더스강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일컫는데, 그 중심 도시가 탁실라(탁샤실라)다. 페샤와르에서 차로 3시간 정도 떨어진 탁실라는 한적한 마을이다. 울창한 나무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각종 사원과 집터가 펼쳐진 시르카프 유적지가 나왔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이 5㎞인데, 알렉산드로스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 수학, 법학, 역사, 의학, 천문학 등을 가르치는 매우 유명한 대학이 있던 곳이다.

유적지 중간에 대로가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그 좌우로는 허물어진 낮은 벽들이 남아 있었다. 길 양 쪽에서는 장이 열렸으며 안쪽은 집터였다. 중간중간 불교와 자이나교 사원이 있었는데 조그만 쌍두독수리 조각도 보였다. 이 쌍두독수리는 바빌론, 스파르타, 스키타이 제국은 물론 로마, 현대의 독일, 러시아 제국의 무기에도 나타나는 유래가 깊은 조각이다.
이곳을 거쳐간 문명은 많았다.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왔었고, 기원전 2세기경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 왕이 지배했었다. 그 후 그리스계의 박트리아(大夏·대하) 왕국은 기원전 2세기경에 간다라 지방을 통치하면서 그리스풍의 예술을 전파한다.
박트리아인들은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전쟁에서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 중앙아시아에 유배당한 후 이곳에서 뿌리내리고 살아왔는데, 이들은 불교를 받아들였다. 전성기 때는 밀린다(메난드로스)왕 때로 그는 비구승 나가세나와 긴 문답을 주고받은 후 불교에 귀의한다. 이것을 적은 것이 바로 유명한 ‘밀린다왕문경(나선비구경)’이다.

◇시르카프 유적지의 부조들
그 후 북방 스키타이족의 일파인 사카왕국과 이란계의 파르티아왕국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지방에서 일어나 인도 북부를 지배한 쿠샨왕조가 이곳을 다스렸다. 이들의 지배 하에서 서기 1, 2세기경 불상이 태어났으니 알렉산드로스가 다녀간 후 아소카왕의 불교 전파, 박트리아인의 그리스적인 예술감각, 쿠샨왕조의 불교 중흥이 결합하여 불상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탁실라에서 불교의 유적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은 자울리안사원이다. 이곳에는 승려들이 명상하던 방과 부엌 집회장 식당 목욕탕들이 남아 있는데, 불상을 우상숭배로 여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목이 베어진 불상이 남아 있어 안타깝다.
탁실라에는 조로아스터교 사원인 잔디알사원도 있다. 네 개의 이오니아식 기둥 뒤에 신전이 있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지성소가 나온다. 지성소와 연단 사이에 공간이 있는데, 예전에는 큰 탑이 있었을 것이고, 그 탑에 불을 피워 놓고 숭배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서기 2세기에 이곳을 지배한 이란계 파르티아인들이 만든 것으로, 조로아스터교는 배화교(拜火敎)라고도 불렸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조아스터의 정확한 활동연대를 기원전 6세기로 추정한다. 반면에 조로아스터는 기원전 1200년에 활동했고 그의 신앙이 확립된 시기가 기원전 6세기라는 설도 있다. 이란 지방에서 사제계급으로 태어난 그는 서른 살쯤에 아후라마즈다라는 선신의 게시를 받고 마흔 즈음에 집을 나가 종교를 창시했다. 그 후 어떤 군주의 보호를 받으며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했으나, 일흔 살 이후에 부족 대립 속에서 암살당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자울리안사원에 있는 불상
그가 내세운 교리는 이 세상은 선신과 악신의 대결장인데, 인간의 의무는 결국 선신의 승리로 끝나는 이 싸움에서 선신 편에 서서 악과 싸우는 것이며, 최후 심판의 날이 오면 인간은 그때 자신이 한 일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너무도 익숙한 최후의 심판 사상은 다신교에 익숙했던 그 시절에는 획기적인 사상이었다. 그의 사상은 훗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속에 이어졌고, 불교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또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의심 많은 도마’가 왔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시카프 유적지 팻말에 적혀 있기를, 이란계 파르티아 왕국 곤도파레스(곤도페르네스)왕이 지배할 때인 서기 30년경에 도마가 이곳을 찾아와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것이다. 도마의 흔적은 남인도에도 남아 있다. 인도의 서남부 항구 코치 부근의 산에 올라가면 그가 활약한 것을 기념한 교회가 남아 있는데, 도마는 그 후 동남부의 도시 첸나이(마드라스)에 가서 죽었다고 한다. 인도의 기독교도들은 그것을 거의 다 믿고 있는데, 이처럼 고대에도 동서 간의 길은 훤히 뚫려 있었다.

◇탁실라의 농촌 풍경
유대인들은 이미 남인도의 코치에 진출해서 솔로몬 시대 때부터 교역을 했고, 그들의 후손이 지금까지 유대인 회당을 짓고 살고 있다. 또 그리스인들은 이미 기원전 5세기경부터 중앙아시아에 소왕국을 만들고 살았으며, 알렉산드로스대왕의 동정 후 동서 간의 길이 고속도로처럼 뚫렸던 것이다. 이 길을 따라 불교와 힌두교는 서방으로, 기독교는 동방으로 오가며 널리 퍼졌다. 그 중심에 간다라 지방이 있고, 그 중심지 탁실라는 수많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역사의 보물창고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빈곤하지만 손님환대엔 지극
유스호스텔 등 숙박시설 다양



파키스탄의 수도는 이슬라마바드인데, 교통 중심지는 그 옆의 라왈핀디라는 곳이다. 라왈핀디에서 간다라의 중심 도시 탁실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요금은 32루피(약 550원). 한 세 시간쯤 갔을까.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 말이 버스가 그곳까지는 안 간다는 것이다. 어찌 된 것일까? 사내는 차장에게 가 한참을 따지더니 13루피를 도로 받아 나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곳까지 가는 미니버스를 찾아내 태워주었다. 그리고 허름한 찻집에서 차 한 잔을 사주는 게 아닌가. 파키스탄은 빈곤한 나라지만 손님 환대는 지극했다. 물론 여자들은 다른 느낌을 갖는다. 이슬람 국가이다 보니 억눌린 성적 욕망을 외국 여자 여행객들에게 풀려는 남성들이 가끔 치근거린다고 경계를 한다. 여행길에서는 늘 중용이 필요한 것 같다. 가슴을 여는 것과 경계하는 것을 적절히 해야 하는데, 내 경우는 파키스탄에서 좋았던 적이 훨씬 많았다.

■여행정보

탁실라에는 그리 숙소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2000∼3000원의 유스호스텔부터 몇 만원하는 중급 숙소까지 부족하지 않게 있다. 페샤와르에서 가려면 미니버스로 세 시간 정도, 라왈 핀디에서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 페샤와르와 간다라 지방(탁실라·스와트계곡)을 여행할 때, 라왈핀디∼탁실라∼라왈핀디∼페샤와르∼스와트계곡(밍고라 혹은 마디안)∼라왈핀디의 순으로 돌면 효율적이다.

◇시르카프 유적지의 쌍두독수리 조각(왼쪽), 탁실라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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