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튼 ‘친절한 금자씨’는 잔혹하지만 후련한 복수극을 보러온 관객들에게 과연 복수를 통해 구원하기가 가능한가를 이상한 방식으로 묻는다. 영화가 대단원으로 치달을 무렵, 곧 금자가 복수극을 실행할 무렵 금자는 자신이 처단하려 했던 백선생이란 절대 악인에 관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금자의 복수는 미뤄지고 다른 사람들이 그 복수극에 끼어든다. 그때부터 일종의 백선생에 관한 공개재판이 벌어지는데 우왕좌왕 상황이 졸렬하게 흘러간다. 이 모든 상황이 ‘올드 보이’처럼 매우 정교한 플롯을 통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로 하여금 주인공 금자의 내면을 곰곰 추리해 보게 하는 수수께끼 풀기 같은 구조로 묘사된다.
정의는 늘 승리한다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일종의 주문 같은 것이다. 현대영화는 이 틀에 박힌 권선징악의 규칙을 깨는 데서 출발했으나 이 영화는 좀 다른 방식으로 묻는다. 이 영화는 ‘처벌을 받을 짓을 한 천하의 몹쓸놈이라 해도 그에게 복수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고 묻는다. 매우 위험해 보이는 이 질문은 실은 복잡한 윤리적 태도를 깔고 있다.
일본의 문학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윤리에 대하여’란 책에서 살인이나 그밖의 흉악한 범죄가 발생하면 반드시 범인의 부모나 가족에게 책임을 묻는 일본 언론의 태도를 예로 들면서 그렇게 책임추궁에 철저한 일본이란 나라가 태평양전쟁의 책임은 회피하는 무책임함을 지적했다. 곧 도덕적, 윤리적 선택에서 우리가 범하기 쉬운 실수는 악의 원인을 특정 개인에 몰아버림으로써 다수가 도덕적 우월감과 면죄부를 얻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다.
공중파 방송에서 가수가 옷을 벗은 사건에 대한 최근의 사회 분위기에서도 그런 상황을 느끼게 된다. 그들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그들의 문화가 대체 어떤 것이기에 그런 몰상식적 행동이 나왔는지에 관한 이해가 선행되기 전에 그저 가학적 비난이 난무하고 있다. 예수는 “죄 없는 자가 저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셨다.
‘친절한 금자씨’도 실은 그 얘기다. 그리고 이는 너무 쉽게 뜨거워지는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스스로 늘 품고 있어야 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김영진 영화평론가·film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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