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의 대학생 거리인 쉐위안로(學院路). 이곳에서는 만화를 보는 청소년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대학생을 주 고객으로 하는 우다커우(五道口) 서점가에도 서가 한가운데에 만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서점 만화서가에는 ‘신암행어사(新暗行御史)’도 꽂혀 있다. 한국 만화다. 이 만화는 일본 내 판권을 사들인 한 일본 출판사가 중국에서 출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류 바람을 타고 원수연 화백의 ‘풀하우스’는 중국 해적판이 나돌고 있다. 중국에서 정식으로 출판된 적은 없건만 중국인이 이를 무단 번역해 전역에 뿌리고 있다.
한국 만화가 이렇듯 알게 모르게 중국으로 넘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만화가협회와 만화 작가들이 중국에 만화법인을 만들면서 중국 시장 진출이 본격화하고 있다. 만화계 일각에서는 ‘만화 한류 바람을 일으켜 보자’는 의욕에 찬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한국만화가협회 부설 만화문화연구소의 이희현 선임연구원(서울창작 상무)은 “중국 만화시장은 급속하게 커지고 있다”면서 “중국 시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불황에 신음하는 국내 만화산업을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으로 건너오는 한국 만화=한국 만화가 중국에 건너오기 시작한 것은 3∼4년 전이다. 2000년대 들어 경제 불황에 컴퓨터게임과 일본의 만화 덤핑까지 겹치면서 한국 만화산업은 기진맥진한 상태다. 1만2000개를 넘던 만화가게가 1000개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 국내 만화산업의 불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이 같은 불황을 넘기 위해 한국 만화산업은 중국 시장을 뚫기 시작했다.
2002년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에서는 한중 만화합자법인 판다카툰(선양우의 판다만화유한공사)이 만들어졌다. 이 회사는 ‘그리스·로마 신화’ ‘안데르센 동화집’을 낸 전창진 화백의 전진프로덕션이 중국에 만든 합자법인이다. 판다카툰은 2003년 선양미술출판사와 그리스·로마 신화 11권을 6만부 발행했다. 이때를 전후해 해적판을 포함한 한국 만화가 간간이 출간됐지만, 이 만화의 출판은 한국 만화의 중국 공식 진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듬해 1월 만화 ‘엽기적인 그녀’도 중국에서 출판됐다. 판다카툰은 지난 4월 광저우 화싱(花星)출판사와 손잡고 9권짜리 안데르센 동화집 18만권, 베이징 중국소년아동출판사와는 유아 만화교재 ‘왈왈(玩兒玩兒)’을 내놓았다.
지난해 8월에는 박봉성 화백과 한국만화가협회가 한중 합자법인 아주만화발전유한공사를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에 열었다. 아주만화발전은 산둥성 지난(濟南)의 지난출판사와 손잡고 한국 만화 4종을 중국판으로 정식 출판할 예정이다.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에는 한국만화가협회 만화문화연구소가 올해 직접 진출, 중국 만화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중국에 부는 ‘만화 한류’=한국 만화의 중국 진출은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만화에서도 한류 바람이 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중국 내 만화산업의 인프라가 워낙 척박한 만큼 한국 만화가 중국 만화문화의 빈 공간을 비집고 들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판다카툰의 전창진 화백은 “한국의 만화 역사가 40년인 데 비해 중국의 만화 역사는 10년 정도에 불과하다”며 “한중은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는 사실이 한국 만화가 중국에서 개화기를 맞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이희현 선임연구원은 “지적재산권 보호를 강화하려는 중국 상황이 한국만화로서는 오히려 기회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순정·서정 만화는 특히 중국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지난해 ‘제우(街舞)’라는 이름으로 지린(吉林)미술출판사에서 출판한 김수용 화백의 ‘힙합’과 중국에서 해적판으로 나돌고 있는 원수연 화백의 ‘풀하우스’는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한류 바람을 타고 있는 국내 연예인 이야기를 만화로 만드는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는 만화가협회와 손잡고 댄스그룹 ‘동방신기’를 주인공으로 하는 만화를 만들어 중국 시장에 뿌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또 가수 다나를 ‘달려라 다나’라는 만화 형태로 만드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달려라 다나는 ‘달려라 하니’의 주인공 하니를 다나로 바꾼 만화다.
이희현 선임연구원은 “중국인의 정서와 철저한 시장조사를 기반으로 중국 시장에 진출하면 한국 만화산업도 새로운 ‘만화 한류’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강호원 특파원
hkang@segye.com
중국 만화시장도 해적판 천국
중국은 해적판 천국이다. 영화 음반시장은 물론 만화시장에도 해적판이 판을 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만화산업의 중국 진출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의 만화 독자는 최소 1억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아직 초기 단계의 시장이지만 만화를 보는 인구만 따지면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규모다.
이처럼 거대시장으로 커지는 중국에서 해적판이 나도는 것은 중국의 만화산업 인프라가 부족한 데다 비싼 원고료와 인세를 주고 해외 만화를 들여오기에는 만화상들이 워낙 영세하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지는 만화는 10%선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는 일본과 대만, 홍콩 만화로 메워지고 있다. 특히 일본 만화는 중국 만화시장의 70∼80%를 점유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중국의 만화산업 역사가 10년 안팎인 만큼 자체 만화 공급이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중국에선 돈벌이가 될 만한 만화 해적판을 시장에 뿌리는 일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만화가협회 만화문화연구소의 이희현 선임연구원은 “이 같은 상황을 놓고 보면 중국에서 출판을 통해 큰 이익을 남기는 것은 현재로서는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중국 만화업계에서는 중국 내 일본 만화도 열이면 아홉은 해적판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고 중국 만화사업이 막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형 출판사와 손을 잡고 출판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대형 출판사는 대부분 정부 산하 출판사다. 전창진 판다카툰 사장은 “이들 출판사의 경영 상황은 국내 출판사보다 더 안정적”이라고 말했다. 만화를 출판하면 해적판이 뒤따라 나와 큰 돈 벌기는 힘들지만 출판사가 망해 돈을 받지 못하는 일은 드물다는 것이다.
판다카툰이 손잡은 광저우(廣州) 화싱(花星)출판사와 중국소년아동출판사 선양(瀋陽)미술출판사, 아주만화발전유한공사와 협력 관계에 있는 지난(濟南)출판사, 김수용 화백의 ‘힙합’을 펴낸 지린(吉林)미술출판사, 박봉성 화백의 ‘삼국지’를 펴낸 창춘(長春)미술출판사 등은 모두 지방정부 산하 출판사다.
이런 점 때문에 일본도 창춘미술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도라에몬’ 출판을 준비 중이다.
베이징=강호원 특파원
hka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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