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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기칼럼]학교종이 땡 땡 땡…

입력 : 2005-03-02 14:10:00 수정 : 2005-03-02 1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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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종이 땡 땡 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왼쪽 가슴에 눈물 콧물 훔치는 손수건 달고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널찍한 운동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교사 옥상 양쪽 귀퉁이에 고개 내밀고 있던 스피커를 통해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꼬맹이들의 머리 위로 울려 퍼지던 그 노래, 광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60년간 대한민국서 국민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누구나 기억할 그 동요의 노랫말과 곡을 지은 김메리 할머니가 향년 101세로 이곳 뉴욕 맨해튼에서 세상을 떴다. 음력으로 1월 1일 설날 밤 11시 45분, 따님 조귀인씨에 따르면 “주무시다가 조용히 숨을 거뒀다”고 했다.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전을 졸업한 뒤 1930년 미국 미시간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가서 음악 석사 과정을 마친 김 여사가 ‘학교종’ 동요를 만든 것은 광복을 맞은 1945년이었다. 당시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있던 김 여사는 미 군정청의 요청으로 국민학교 1학년용 음악 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고 우연히 전차를 타고 가다가 국민학교 어린이들이 입학식 날 처음 등교하는 정경을 떠올리면서 그 자리에서 작사·작곡했다고 전해진다.

김메리 여사는 자신이 작사 작곡한 그 동요를 좌우명으로 삼은 듯이 세상을 학교로 삼으신 분이었다. 철저하게 자기 완성을 추구하면서도 그 만큼 철저하게 이웃을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유학 당시 미시간주에서 사업을 하던 조오흥씨와 1936년 서울에서 결혼했던 김 여사는 일제 총독부가 1939년 친미파였던 부군 조씨를 강제 추방하자 한 동안 혼자 생활하다가 1947년 남편이 살고 있는 미시간주로 건너간다. 여자 나이로 치면 결코 적지 않은 49세 때 미 웨인대학 대학원에서 생화학과 미생물학을 공부한 뒤 1953년부터 1977년까지 병원에서 의학 연구원으로 제2의 인생을 보냈던 김 여사는 1977년 남들은 은퇴하여 손주의 재롱이나 볼 73세의 나이에 평화봉사단에 자원해서 3년 동안 아프리카 서부지역의 라이베리아에서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했었다.

뉴욕으로 처음 이민와서 ‘학교종이 땡 땡 땡’의 전설이 이곳에 계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국민학교 담임 선생님 소식을 듣는 것처럼 가슴이 설랬었다.정작 한번도 제대로 뵙지는 못했지만 여자로서 사는 게 힘들다고 여겨질 때마다 그 분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서 흔들리는 자신을 바로 잡기도 했다.고령에도 불구하고 한인 교회 설립에 바쁘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김 여사처럼 은퇴 없는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었다. 향년 101세면 보기 드믈게 천수를 누렸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생전에 오손도손 이야기 나누면서 배우고 싶었던 바램이 무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삼가 머리 숙여 김 여사의 명복을 빈다.

쑥스럽지만, 김 여사처럼 누구나 부르는 노래를 짓지는 못했지만, 나 역시 종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릴 적 강화도의 낙조에 한층 더 구슬픈 색깔을 입히던 절간의 범종 소리, 교복의 하얀 칼라를 빳빳하게 풀먹여 고개를 제대로 돌리지 못하던 중고등 학교 시절 시를 읽게 만들던 성당의 종소리, 유신 시절 무슨 행사 때마다 울려 퍼지던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음울한 늦가을 골목에 울려퍼지던 두부 장수의 방울 종소리....숱하게 많은 종소리를 들으며 커온 탓인지 지금도 종소리별로 그 때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염원하는 것도 종소리에 따라 달라졌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지나간 삶을 반추해보건대 종을 치기보다는 누군가 친 종소리를 들은 게 더 많았던 것 같다. 학교종은 자기수양과 공부, 절간이나 성당의 종소리는 삶에 대한 고민, 새마을의 새벽종은 정치적 사회적 인식, 두부장수 방울 종소리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뒤흔들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어떤 종소리는 머리를 울려댔고, 어떤 종소리를 가슴을 울렸고, 또 어떤 종소리는 마음을 흔들어댔다. 김 메리 여사처럼 심지가 굳세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그걸 좋은 표현으로 바꾸자면, 그 만큼 종소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할 여유가 없었던 나로서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급선무였고 그 이상은 사치로 여겼었다.

신문기자나 갤러리 관장같은 직책도 따지고 보면 종소리를 듣는 입장이다. 뉴스메이커나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종소리’를 듣고 소화해내고 또 누군가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이다. 언젠가는 나도 한번 멋지게 종을 쳐보겠다는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우치게 된 지금은 종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소리가 얼마나 멀리 퍼질지 걱정하며 종을 치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주고 싶다.

/김옥기·미주세계일보편집인

<전교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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