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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월드]도서관은 독서실이 아닙니다

입력 : 2004-11-13 11:52:00 수정 : 2004-11-13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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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도서관 도서관에 얼마나 자주 가느냐는 물음에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일주일에 한 번 간다고 하면 자주 가는 편에 속한다. 아마 1년에 한 번도 가지 않는 이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도서관에 가는 목적이다. 집에선 공부가 안 되고 도서관에 가야 공부가 잘되니까 가는 이가 많을 터이다.
조용히 공부하는 곳은 도서관이 아니라 ‘독서실’이다. 도서관을 독서실로 착각하는 국민의식이 한국 도서관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인식의 지체가 제도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이용객은 이 문제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도서관의 독서실화’,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도서관 이용 실태를 취재하려고 서울 남산도서관을 찾은 것은 지난달 23일 오후였다. 이곳은 44만여권의 장서와 4개의 열람실을 갖추고 있다. 402석으로 열람실 중 가장 규모가 큰 제3열람실에 들러봤다. 예상대로 책상 위에는 각종 자격증 수험서, 영어 학습서, 두꺼운 법전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도서관의 ‘열람실’은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을 읽는 장소인데도 이용객들이 가져온 책으로 공부하는 장소가 돼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인식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용객들도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도서관에서 만난 한 취업준비생은 “다들 도서관을 조용히 공부하는 곳으로 알고 있는 것 아니냐”며 “도서관과 독서실의 차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런 걸 뭐하러 물어보느냐며 이름도 밝히지 않을 정도다. 대학생 박현민(26)씨도 “자격시험을 준비하러 왔다”며 “도서관이든 독서실이든 무슨 상관인가”라고 했다.
24일에는 서울 정독도서관을 찾았다. 이곳에는 9개의 열람실이 갖춰져 있어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모이기로 유명한 곳이다.
3층에 있는 제2열람실에는 어김없이 250여명의 이용객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열람실을 한바퀴 둘러보니 도서관에서 빌린 듯한 책을 놓아두고 독서하는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모두 대여섯 권의 수험서를 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취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한자능력검정시험을 대비하고 있다는 이민철(29)씨에게 물어보니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며 “도서관에 그냥 공부하러 온다”고 말했다. 뭐, 공부하겠다는데 시비를 걸 수야 없지만, 왜 우리나라 도서관은 모두 독서실이 돼야 하는 걸까.

◇남산도서관 내 한 도서대출실의 휑한 모습이 이용객들로 북적거리는 열람실과 대조를 이룬다. 하루 평균 도서대출량이 80여권에 불과하다.

문화관광부가 2년 전 실시한 ‘국민독서실태조사’를 보면 이 같은 문제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도서관 이용목적 설문에서 ‘시험공부를 위해서’라는 답변이 30%로 ‘책 열람 및 대출’(42.2%)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96년도 조사(39.6%)에 비하면 시험공부 이용객이 다소 줄긴 했지만, 여전히 ‘도서관의 공부방화(化)’는 해결되지 않고 있는 과제인 것이다.
소설가 고정욱씨는 최근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다. “독서실을 운영하지 않는 공공도서관에 자신의 책을 가지고 와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는 민원이 많다. 이는 도서관의 기능을 오해한 것이다.” 그의 말처럼 ‘높으신 분’들도 도서관에 시찰 나와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고시생이 왜 안 보이느냐”고 묻는 것이 우리 도서관 이해의 현주소인지도 모른다.
도서관의 생명인 ‘접근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자. 무엇보다 도서관은 일단 가까워야 한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활동반경에서 1.5∼2㎞ 밖에 있으면 쉽게 찾지 않는 게 인간심리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도서관을 잘 찾지 않는 데는 위에서 말한 두 곳을 비롯한 대부분의 도서관이 산밑이나 외곽지역에 자리잡은 현실도 한몫 하고 있다.
이웃 나라 일본은 이미 1977년 “도서관은 어디에서 걸어도 7분 이내 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정책 목표를 수립했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마천루 숲에서도 5∼10분만 걸으면 공공도서관에 닿을 수 있다고 한다. 국내 도서관들의 접근성 현황을 보여주는 공식적인 통계는 아쉽게도 나와 있지 않아 일목요연하게 이 문제를 설명하긴 힘들다. 다음과 같은 예가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듯싶다.
국립중앙도서관을 지하철을 타고 가려면 2호선 서초역에서 내려야 한다. 그런데 서초역 5번 출구로 나오면 가장 가까운 곳이 대법원이고 그다음에 대검찰청, 서초경찰서가 차례로 나타난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가려면 10분 이상 ‘이제야 나오나 저제야 나오나’ 하며 다리 아프게 걸어야 하는 것이다.
국민이 자주 찾고 친근한 곳일수록 더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할 터인데, 실상은 그 반대로 돼 있는 꼴이다. 일반 국민이 대법원이나 대검찰청을 찾을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관공서조차 현실의 권력관계에 따라 배치되고, 도서관 같은 문화시설은 홀대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국제도서관연맹(IFLA)과 유네스코가 94년 공동으로 펴낸 ‘공공 도서관 선언’은 “공공 도서관이 성공적으로 목적을 달성하려면 모든 잠재 이용자들이 도서관 서비스에 충분히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고의적이든 우발적이든 접근에 제한이 생긴다면 도서관은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도서관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도서관을 독서실로 아는 이용객들의 의식을 꼽는다. 도서관협회 이용훈 기획부장은 “도서관은 반드시 조용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편견이 도서관을 외진 곳으로 내몰고 있다”고 말했다. 숭문중학교 김효석 국어·사서교사도 “도서관은 조용한 곳이어야 한다는 반시대적 고정관념이나 엄숙주의 때문”으로 평가했다.
문제는 도서관을 독서실로 아는 인식이 접근성뿐 아니라 장서 확충, 사서 확보 등 한국 공공 도서관의 고질적 병폐들을 해소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용훈 기획부장은 도서관이 발전하려면 ‘민원’이 중요한데, 이용객들이 조용히 공부할 공간만 원하니까 도서관 인프라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 제기조차 별로 없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인식이 사회환경에서 비롯됐다며 이용자만을 탓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전문가도 없지는 않다. 이용남 한성대 지식정보학부 교수는 “도서관이 독서실처럼 운영돼 온 것은 광복 이후 계속된 고질”이라며 “이용자들만 탓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윤정옥 청주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도 “우리 현실에서 도서관 외에 학습권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지 않으냐”며 이용객들을 두둔하는 입장을 보였다.
원인이야 어찌됐든 도서관의 독서실화가 접근성을 약화시켜 도서관 출입을 어렵게 만드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서울 남산도서관의 한 열람실을 가득 메운 이용객들이 시험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책은 없는 것일까. 물론 궁극적으로는 의식을 바꾸고 도서관을 많이 짓는 것만이 근본 해법이 될 수 있겠지만, 당장 실현 가능한 방법이라도 찾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대학 등 각급 학교의 도서관을 일반에 개방해 보면 어떨까. 우리나라에 대학도서관은 420여곳에 이른다. 공공도서관 수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지만 장서량은 7580만여권으로 공공도서관보다 오히려 더 많다.
이런데도 한해 이용객 수는 6050만여명으로 공공도서관의 8470만명에 비해 훨씬 적은 수준이다. 방방곡곡 대학 없는 곳은 많지 않으니 대학 도서관을 일반에 개방한다면 접근성을 대폭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국가적으로 봐도 공공 도서관 신설보다도 대학 도서관 개방이 비용 면에서 합리적일 수 있다.
물론 대학이 재학생 이외의 사람들에게 쉽게 문호를 개방할까 싶지만, 사립대학도 정부 지원금을 받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혀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닐 터다. 다만 대학 도서관 열람실 공간이 좁아 공공 도서관까지 원정 오는 대학생들이 많은 점을 감안하면 도서관 증축이 우선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경희대의 경우 학생 1인당 도서관 면적(재적수/도서관 면적)이 0.25평에 불과한 실정이다.
동네마다 있는 초·중·고등학교 도서관까지 일반에 개방한다면 도서관 역량 강화를 위해 정부 지원을 강력히 요구할 수 있는 명분과 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게 힘들다면 공공 도서관을 세울 때 도서관과 독서실을 분리해 짓는 건 어떨까. 실제 서울 광진정보도서관은 ‘도서관동’과 독서실 기능을 담당하는 ‘문화동’을 분리 운영해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도서관은 시험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지식과 정보에 접근하고 열람하는 장소’라는 인식이 뿌리내릴 때에만 우리 도서관은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96년 열람실을 폐지했지만, 모범적 운영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도서평론가 이권우씨의 문제 제기를 경청해 보자.
“명문대 입학과 세속적 출세를 위한 개인적 학습 욕구를 공공 영역이 지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공공 도서관에서 무료로 공부해 사회에서 성공하고도 도서관 발전을 위해 봉사하거나 기부금을 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글 염기석, 사진 황정아기자
/yks74@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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