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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딸깍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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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4-07-06 16:35:00 수정 : 2004-07-06 16: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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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에나 신는 나막신을 마른 날에도 항시 신을 만큼 가난했던 ‘남산골 샌님’을 가볍게 비틀어 야유하는 별칭이 ‘딸깍발이’다. 이 말은 원로 국문학자 일석(一石) 이희승 선생의 대표작 수필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 수필엔 굶기를 밥먹듯 하고 행색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름대로 청렴한 생활신조를 지켰던 남산골 샌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두 볼이 야윌 대로 야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면 양 볼의 가죽이 입안에서 맞닿을 지경”이지만 두 눈은 영채가 돌고, 굳세게 다문 입은 의지력과 기개를 보여준다. 이리저리 꿰맨 헌 망건과 헌 갓이나마 의관 정제하고 유교 경전을 읽으며 공부에 몰두한다.
꼬장꼬장 고지식에 “양반은 얼어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지조로 뭉쳐진 딸깍발이는 평생 타협을 모르고 국어 연구에만 매진, 조선어학회사건 등으로 옥고까지 치렀던 일석 선생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93년 첫 공직자 재산공개 당시 고위 법관 103명 중 재산이 꼴찌였다 해서 ‘꼴찌판사’ ‘딸깍발이 판사’로 불리던 조무제 대법관이 다음달 퇴임식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해서 화제다. 법원 내 청빈 (淸貧)판사의 대표격인 그는 대법관이 된 후에도 작은 오피스텔을 세내 생활했고 모든 청탁은 물론 법조계 관행인 전별금조차 챙긴 적이 없다. 골동품 수준의 전화기나 TV세트를 사용하면서도 정치·사회적으로 논란의 대상인 수많은 사건을 심리하고 연구해 법리에 충실한 가이드라인을 제시, 존경을 받았다. “이기적이고 약지만 백년대계보다는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현대인들을 질타했던 딸깍발이 이희승 선생이 들으면 반가워하겠지만, 법조계에도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게 뉴스가 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청렴, 예의, 염치가 실종돼가는 무한욕망의 세태 속에서 딸깍발이가 설 땅은 없어 보인다.
차미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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